시(詩)와 詩魂 749

세월에게 / 김명인

세월에게 / 김명인 내 늑골의 골짜기 마다 피빛 절이며 세월이여/ 비 그치니 지금 눈부시게 불타는 계절은 가을/ 대지의 신열은 가라앉고 생식과 치욕조차 시들어/ 시월의 잎들과 11월의 빈 가지 사이/ 걸어갈 작은 길 하나 걸쳐져 있다/ 잿빛 날개 펼치고 저기 새 한 마리/ 숱한 사연과 사연도 저희끼리/ 공중제비로 흩어 구름 흘러간다/ 목 놓아 우는 것이 어디 여울뿐이랴/ 둔덕의 갈댓머리 하얗게 목이 쉬어도/ 그리움의 노래 대답 없으니/ 마침내 위안없이 걸어야 할/ 남은 시간이 마저 보인다//

시(詩)와 詩魂 2021.09.28

돈 / 김명인

돈 / 김명인 한때 나는 대학 입학금을 마련 못 해 사흘 밤낮을/ 꼬박 울며 지샌 적이 있다/ 비웃지 마라, 그땐 그게 절박했었다/ 그렇다 두 분 형님께서 포기한 대학을/ 내가 끝까지 마쳤던 것은 돈에 대한/ 맹목의 복수심 때문이었을까/ 마침내 내 대학이 선탄부로 가정교사로 끝이 났을 때// 배운 것이야 무엇이든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모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선생이 되었다/ 이 나라에서 돈 버는 길이란 사기거나 투기라고/ 일깨워준 저 7,80년대의 경제를 거쳐/ 내가 집칸이나 장만한 것은 그 길에/ 밝아서가 아니라 아내의 맞벌이 덕이었다// 그러나 돈이 돈을 거둬들인다고 뒤늦게 한탄한 아내여/ 남편은 백면의/ 여전히 주변머리 없는 서생이었을 뿐/ 무슨 주제로 헐거운 돈을 만났겠는가/ 그대의 눈썰미가 ..

시(詩)와 詩魂 2021.09.28

석류 / 김명인

석류 / 김명인 푸르스름한 둥근 공이 분홍빛 촉수를 열고/ 꼬마 알전구 하나 내밀면서/ 석류도 뒤늦게 꽃燈 매달았다/ 여름내 초록 숲길을 더듬고 가야 할/ 순 자연산 손전등,/ 대궁이자 열매인 꽃의 전부/ 저 불 깜박이면 검은 잎맥 사이에서 깨어나는/ 아가가 한 주먹 가득 잼 잼 움켜쥐겠지/ 우윳빛 볼 두덩에 살색 올리겠지/ 哄笑 깨물고 가지런한 치열 벙글겠지/ 마침내 너도 한 입/ 시린 사랑 덥석 베어 물어야지/ 내가 들고 선 오늘이 보잘것없는 숫기임을/ 석류를 보면서 비로소 깨닫는다, 잇몸이/ 시큰거리도록 군침이 도는/ 비릿한 첫사랑 생살아!//

시(詩)와 詩魂 2021.09.28

소금바다로 가다 / 김명인

소금바다로 가다 / 김명인 내 몸이 소금을 필요로 하니, 날마다 소금에 절어가며/ 먹장 모연 세월 썩는 육체를 안고 가는 여행 힘에 겹네/ 썩어서 부식토가 되는 나뭇잎이 자연을 이롭게 한다면/ 한줌 낙엽의 사유라도 길바닥에 떨구면 따뜻하리라/ 그러나 찌든 엽록의 세상 너덜토록/ 풍화시킨 쉰 살밖에 없어/ 후줄근한 퇴근길의 오늘 새삼 춥구나/ 저기, 사람이 있네, 염전에는 등만 보이고/ 모습을 볼 수 없는 소금 굽는 사람이 있네/ 짜디짠 땀방울로 온몸 적시며/ 저물도록 발틀 딛고 올라도 늘 자기 굴헝에 떨어지므로/ 꺼지지 않으려고 수차를 돌리는 사람, 저 무료한 노동/ 진종일 빈 허벅만 퍼올린 듯 소금 보이지 않네/ 하나, 구워진 소금 어느새 썩는 살마다 저며와 뿌옇게/ 흐린 눈으로 소금바다 바라보게 하네..

시(詩)와 詩魂 2021.09.28

너와집 한 채 / 김명인

너와집 한 채 /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 바다 온통 단풍 불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살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붙는 몸으로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 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 흙..

시(詩)와 詩魂 2021.09.28

집 / 김명인

집 / 김명인 새집들에 둘러싸이면서/ 하루가 다르게 내 사는 집이 낡아간다/ 이태 전 태풍에는 기와 몇 장 이 빠지더니/ 작년 겨울 허리 꺾인 안테나/ 아직도 굴뚝에 매달린 채다/ 자주자주 이사해야 한재산 불어난다고/ 낯익히던 이웃들 하나 둘/ 아파트며 빌라로 죄다 떠나갔지만/ 이십 년도 넘게 나는/ 언덕길 막바지 이 집을 버텨왔다/ 지상의 집이란/ 빈부에 젖어 살이 우는 동안만 집인 것을/ 집을 치장하거나 수리하는/ 그 쏠쏠한 재미조차 접어버리고서도/ 먼 여행 중에는 집의 안부가 궁금해져/ 수도 없이 전화를 넣거나 일정을 앞당기곤 했다/ 언젠가는 또 비워주고 떠날/ 허름한 집 한 채/ 아이들 끌고 이 문간 저 문간 기웃대면서/ 안채의 불빛 실루엣에도 축축해지던/ 시퍼런 가장의/ 뻐꾸기 둥지 뒤지던 세월..

시(詩)와 詩魂 2021.09.28

부석사 / 김명인

부석사 / 김명인 한 시절 반짝임 푸른 무량이어서/ 청록 지천만큼이나 탕진 끝없을 줄 알았는데/ 어느새 센 머리 허옇게 뒤집어쓴/ 겨울 소백산맥 바라보며/ 외사촌 아우 빈소 자리로 가고 있다/ 눈발이나 희끗거릴 바람의 마력이라면/ 힘껏 던져도 부풀릴 수 없는 바위 꿈/ 매양 처지는 길뿐이겠느냐./ 어떤 필생을 거기 매달았다 해도/ 지금은 헐벗은 가지들, 그 떨림만으로/ 고스란히 눈꽃을 받들고 있다./ 눈구덩이에 처박힌 바퀴 빼내려고/ 질척거리는 발밑 다잡다 보면/ 여기 어디 뜬 돌 위에 지어진 절 이정표가 섰었는데/ 산모퉁이 몇 번 다시 감돌아도/ 겹겹 등성이만 에워쌀 뿐 절은 안 보인다./ 안 그래도 금세 함박눈 차폐되어 가로막는데/ 그 막 안에 또 내가 갇혔다. 부석사/ 뜬 돌 위의 허공이어서/ 나는..

시(詩)와 詩魂 2021.09.28

화엄(華嚴)에 오르다 / 김명인

화엄(華嚴)에 오르다 / 김명인 어제 하루는 화엄 경내에서 쉬었으나/ 꿈이 들끓어 노고단을 오르는 아침 길이 마냥/ 바위를 뚫는 천공 같다,/ 돌다리 두드리며 잠긴/ 山門을 밀치고 올라서면 저 천연한/ 수목 속에서도 안 보이는/ 하늘의 雲板을 힘겹게 미는 바람소리 들린다/ 간밤에는 비가 왔으나, 아직 안개가/ 앞선 사람의 자취를 지운다, 마음이 九折羊腸인 듯/ 길을 뚫는다는 것은/ 그렇다, 언제나 처음인 막막한 저 낯선 흡입/ 묵묵히 앞사람의 행로를 따라가지만/ 찾아내는 것은 이미 그의 뒷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엇이 이 산을 힘들게 오르게 하는가/ 길은, 누군들에게 물음이 아니랴/ 저기 산모롱이 이정표를 돌아/ 의문부호로 꼬부라져 羽化登仙해 버린 듯 앞선 일행은/ 꼬리가 없다, 떨어져도 떠도는 산울..

시(詩)와 詩魂 2021.09.28

후렴 / 김명인

후렴 / 김명인 어머니가 후렴처럼 물으신다, 늬 누고?/ 수없이 일러드린 그 물굽이다, 콱콱 결리는/ 가슴속 복면들과 마주서면/ 어디선가 돛폭 구겨지는 소리가 들린다/ 몇 년째 벗어나지 못한 무풍지대에/ 한 점 바람이 분다는 것일까?/ 풍파에 펼쳤다면 격랑 속일 텐데/ 어머니는 여러 해째 같은 바다를 헤메신다/ 후렴조차 없다면 거룻배는/ 돌아서지 않는 썰물에 휩쓸린 것이다//

시(詩)와 詩魂 2021.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