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복효근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복효근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 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 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시(詩)와 詩魂 2021.10.09

마늘촛불/복효근

마늘촛불 - 복효근 삼겹살 함께 싸 먹으라고 얇게 저며 내 놓은 마늘쪽 초록색 심지 같은 것이 뾰족하니 박혀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마늘어미의 태 안에 앉아 있는 마늘아기와 같은 것인데 알을 잔뜩 품은 굴비를 구워 먹을 때처럼 속이 짜안하니 코끝을 울린다 무심코 된장에 찍어 씹어 삼키는데 들이킨 소주 때문인지 그 초록색 심지에 불이 붙었는지 그 무슨 비애 같은 것이 뉘우침 같은 것이 촛불처럼 내 안의 어둠을 살짝 걷어내면서 헛헛한 속을 밝히는 것 같아서 나도 누구에겐가 싹이 막 돋기 시작한 마늘처럼 조금은 매콤하게 조금은 아릿하면서 그리고 조금은 환하게 불 밝히는 사랑이고 싶은 것이다

시(詩)와 詩魂 2021.10.09

고목/복효근

고목 복효근 오동은 고목이 되어갈수록 제 중심에 구멍을 기른다 오동뿐이랴 느티나무가 그렇고 대나무가 그렇다 잘 마른 텅 빈 육신의 나무는 바람을 제 구멍에 연주한다 어느 누구의 삶인들 아니랴 수많은 구멍으로 빚어진 삶의 빈 고목에 어느 날 지나는 바람 한줄기에서 거문고 소리 들리리니 거문고 소리가 아닌들 또 어떠랴 고뇌의 피리새라도 한 마리 세 들어 새끼칠 수 있다면 텅 빈 누구의 삶인들 향기롭지 않으랴 바람은 쉼없이 상처를 후비고 백금칼날처럼 햇볕 뜨거워 이승의 한낮은 육탈하기 좋은 때 잘 마른 구멍 하나 가꾸고 싶다

시(詩)와 詩魂 2021.10.09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복효근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복효근 내가 꽃피는 일이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면 꽃은 피어 무엇하리 당신이 기쁨에 넘쳐 온누리 햇살에 둘리어 있을 때 나는 꽃피어 또 무엇하리 또한 내 그대를 사랑한다 함은 당신의 가슴 한복판에 찬란히 꽃피는 일이 아니라 눈두덩 찍어내며 그대 주저앉는 가을 산자락 후미진 곳에서 그저 수줍은 듯 잠시 그대 눈망울에 머무는 일 그렇게 나는 그대 슬픔의 산높이에서 핀다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시(詩)와 詩魂 2021.10.09

공터의 사랑 / 허수경

공터의 사랑 -허수경 한참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이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 잎 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시(詩)와 詩魂 2021.09.28

화양연화花樣年華 /류시화

화양연화花樣年華 -류시화 나는 너의 이마를 사랑했지 새들이 탐내는 이마 이제 막 태어난 돌 같은 이마 언젠가 한 번은 내 이마였던 것 같은 이마 가끔 고독에 잠기는 이마 불을 끄면 소멸하는 이마 스물두 살의 봄이었지 새들의 비밀 속에 내가 너를 찾아낸 것은 책을 쌓아 놓으면 둘이 누울 공간도 없어 거의 포개서 자다시피 한 오월 내 심장은 자주 너의 피로 뛰었지 나비들과 함께 날들을 세며 다락방 딸린 방을 얻은 날 세상을 손에 넣은 줄 알았지 넓은 방을 두고 그 다락방에 누워 시를 쓰고 사랑을 나누었지 슬픔이 밀려온 밤이면 조용한 몸짓으로 껴안았지 어느 날 나는 정신에 문제가 찾아와 하루에도 여러 번 죽고 싶다, 죽고 싶다고 다락방 벽에 썼지 너는 눈물로 그것을 지우며 나를 일으켜 세웠지 난해한 시처럼 닫..

시(詩)와 詩魂 2021.09.28

침묵/김명인

침묵 -김명인 긴 골목길이 어스름 속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녁을 지켜본다 그 착란 속으로 오랫동안 배를 저어 물살의 중심으로 나아갔지만 강물은 금세 흐름을 바꾸어 스스로의 길을 지우고 어느덧 나는 내 소용돌이 안쪽으로 떠밀려 와 있다 그러고 보니 낮에는 언덕 위 아카시아 숲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나무가 제 우듬지를 세우려고 애쓰는지 침묵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 물음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생겨나듯 상상도 창 하나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것 창의 부분 속으로 한 사람이 어둡게 걸어왔다가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한동안 그쪽으로는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나는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본다 그 속에..

시(詩)와 詩魂 2021.09.28

가을에 / 김명인

가을에 / 김명인 모감주 숲길로 올라가니/ 잎사귀들이여, 너덜너덜 낡아서 너희들이/ 염주소리를 내는구나, 나는 아직 애증의 빚 벗지 못해/ 무성한 초록 귀떼기마다 퍼어런/ 잎새들의 생생한 바람소리를 달고 있다/ 그러니, 이 빚 탕감 받도록/ 아직은 저 채색의 시간 속에 나를 놓아다오/ 세월은 누가 만드는 돌무덤을 지나느냐, 흐벅지게/ 참꽃들이 기어오르던 능선 끝에는/ 벌써 잎지운 굴참 한 그루/ 늙은 길은 산맥으로 휘어지거나 들판으로 비워지거나/ 다만 억새 뜻 없는 바람무늬로 일렁이거나//

시(詩)와 詩魂 2021.09.28

길 / 김명인

길 / 김명인 길은 제 길을 끌고 무심하게/ 언덕으로 산모퉁이로 사라져가고/ 나는 따라가다 쑥댓닢 나부끼는 방죽에 주저앉아/ 넝마져 내리는 몇 마리 철새를 본다/ 잘 가거라, 언덕 저켠엔/ 잎새를 떨군 나무들/ 저마다 갈쿠리 손 뻗어 하늘을 휘젓지만/ 낡은 해는 턱없이 기울어 서산마루에 있다/ 길은 제 길을 지우며 저물어도/ 어느 길 하나 온전히 그 끝을 알 수 없고/ 바라보면 저녁 햇살 한 줄기 금빛으로 반짝일 뿐/ 다만 수면 위엔 흔들리는 빈 집일뿐//

시(詩)와 詩魂 2021.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