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화양연화花樣年華 /류시화

나뭇잎숨결 2021. 9. 28. 09:51

화양연화花樣年華 

 

 

-류시화

 

 

나는 너의 이마를 사랑했지

새들이 탐내는 이마

이제 막 태어난 돌 같은 이마

언젠가 한 번은 내 이마였던 것 같은 이마

가끔 고독에 잠기는 이마

불을 끄면 소멸하는 이마

 

스물두 살의 봄이었지

새들의 비밀 속에

내가 너를 찾아낸 것은

책을 쌓아 놓으면 둘이 누울 공간도 없어

거의 포개서 자다시피 한 오월

내 심장은 자주 너의 피로 뛰었지

나비들과 함께 날들을 세며

 

다락방 딸린 방을 얻은 날

세상을 손에 넣은 줄 알았지

넓은 방을 두고 그 다락방에 누워

시를 쓰고 사랑을 나누었지

슬픔이 밀려온 밤이면

조용한 몸짓으로 껴안았지

 

어느 날 나는 정신에 문제가 찾아와

하루에도 여러 번 죽고 싶다, 죽고 싶다고

다락방 벽에 썼지

너는 눈물로 그것을 지우며

나를 일으켜 세웠지

난해한 시처럼 닫혀 버린 존재를

 

내가 누구인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었지

훗날 인생에서 우연히 명성을 얻고

자유로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그때가 나의 화양연화였지

다락방 어둠 속에서 달처럼 희게 빛나던

그 이마만이 기억에 남아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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