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도 / 이육사 청포도 - 이육사 내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 가는 계절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돚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시(詩)와 詩魂 2024.06.30
길에 관한 독서 /이문재 길에 관한 독서 이문재 1 한때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주곤 했을 때 어둠에도 매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으로 아무 데서나 길을 내려서곤 하였다 떠나가고 나면 언제나 암호로 남아 버리던 사랑을 이름 부르면 입 안 가득 굵은 모래가 씹혔다 2 밤에 길은 길어진다 가끔 길 밖으로 내려서서 불과 빛의 차이를 생각다 보면 이렇게 아득한 곳에서 어둔 이마로 받는 별빛 더 이상 차갑지 않다 얼마나 뜨거워져야 불은 스스로 밝은 빛이 되는 것일까 3 길은 언제나 없던 문을 만든다 그리움이나 부끄러움은 아무 데서나 정거장의 푯말을 세우고 다시 펴보는 지도, 지도에는 사람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4 가지 않은 길은 잊어버리자 사람이 가지 않는 한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의 속력은 오직 사람의 속력이다 줄지어 가는 길은 .. 시(詩)와 詩魂 2024.06.30
오래된 기도 /이문재 오래된 기도 이문재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그렇게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이 멈추기만 해도 꽃 진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을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이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 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만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시(詩)와 詩魂 2024.06.30
손의 백서 /이문재 손의 백서 - 이문재기도할 때 두 손을 모으는 까닭은 두 손을 모으지 않고는 나를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손을 모으지 않고는 가슴이 있는 곳을 찿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손을 모으지 않고는 머리를 조아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두 손을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으지 않고서는 신이 있는 곳을 짐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으는 까닭은 두 손을 모아야 고요해지기 때문이다 손이 손을 잡으면 영혼의 입술이 붉어진다 손이 손을 잡으면 가슴이 환하게 열린다 손이 손을 잡으면 피돌기가 빨라진다 손이 손을 잡는 순간 기억을 공유한다 손이 손을 잡는 순간 몸이 몸을 만난다 손이 세상을 바꿔왔듯이 손이 다시 세상을 바꿀 것이다 나는 손이다 너도 손이다 시(詩)와 詩魂 2024.06.30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 /황지우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 -황지우 나, 이번 生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 손만 댔다 하면 中古品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괘종시계가 오후 2시를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 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괘종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 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膜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 밸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도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 시(詩)와 詩魂 2024.06.30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황지우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황지우 내가 지도교수와 암스테르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커피 솝 왈츠의 큰 통유리문 저쪽에서 당신이빛을 등에 지고서 천천히 印畵되고 있었다.내가 들어온 세계에 당신이 처음으로 나타난 거였다.그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니었지만,암스테르담은 어떤 이에겐 소원을 뜻한다.구청 직원이 서류를 들고 北歐風 건물을 지나간 것이나가로수 그림자가 그물 친 담벼락, 그 푸른 投網 밑으로당신이 지나갔던 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닌,단지 시간일 뿐이지만 디지털 시계 옆에서음악이 다른 시간을 뽑아내는 것처럼,당신이 지나간 뒤 물살을 만드는 어떤 그물에 걸려나는 한참 동안 당신을 따라가다 왔다.세계에 다른 시간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은어느 축선에서 만난다 믿고 나는.. 시(詩)와 詩魂 2024.06.30
뼈아픈 후회 / 황지우 뼈아픈 후회 -황지우슬프다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모두 폐허다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모두 떠났다.내 가슴속에 언제나 부우옇게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언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高熱의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내가 자청(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 시(詩)와 詩魂 2024.06.30
시에게/황지우 시에게 -황지우 한때시에 피가 돌고,피가 끓던 시절이 있었지;그땐 내가 시에 촌충처럼 빌붙고피를 빨고 앙상해질 때까지 시를학대하면서도, 딴에는 시가 나를 붙들고 놔주질 않아세상 살기가 폭폭하다고만 투덜거렸던 거라.이젠 시에게 돌려주고 싶어.피를 갚고환한 화색을 찾아주고모시고 섬겨야 할 터인데언젠가 목포의 없어진 섬 앞, 김현 선생 문학비세워두고 오던 날이었던가?영암 월출산 백운동 골짜기에천연 동백숲이 한 壯觀을 보여주는디이따아만한(나는 두 팔을 동그랗게 만들어 보인다) 고목이허공에 정지시켜놓았던 꽃들을 고스란히땅 우에, 제 슬하 둘레에 내려놓았드라고!産달이 가까운 여자후배 하나가뚱게뚱게 걸어서 만삭의 손으로그 동백꽃.. 시(詩)와 詩魂 2024.06.30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 황지우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 황지우 해 속의 검은 장수하늘소여눈먼 것은 성스러운 병이다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보일까 어찌하겠는가, 깨달았을 때는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알지만 나갈 수 없는, 無窮의 바깥;저무는 하루, 문 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시(詩)와 詩魂 2024.06.30
7월/오세영 7월 -오세영 바다는 무녀(巫女)휘말리는 치마폭 바다는 광녀(狂女)산발(散髮)한 머리칼, 바다는 처녀(處女)푸르른 이마, 바다는 희녀(戱女)꿈꾸는 눈, 7월이 오면 바다로 가고 싶어라,바다에 가서미친 여인의 설레는 가슴에안기고 싶어라. 바다는 짐승,눈에 비친 푸른 그림자. 시(詩)와 詩魂 2024.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