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5월의 편지 / 목필균

5월의 편지 / 목필균가끔은 스무 살 젊음이고 싶다. 안개 배인 공지천을 산책하던 우리의 노래는 하얗게 웃어대던 아카시아 향기로 가득했지. 미숙한 사랑을 지켜온 백치 같았던 순결, 그 시절, 네 그림자 허리를 잡고 안부를 묻고 싶다. 잎새 반짝이던 은백양 나무에 걸려있던 우리의 시들은 오월의 축제를 사열하고, 교정의 기인 *외수아저씨는 순수를 위해 몸을 닦지 않는다는 모순된 말로 자신의 남루를 덮고 있었지. 잔디밭 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며 시선을 끌던 작은 키의 동기생은 한 학기를 떠돌다 사라지기도 하고. 시내에서 변두리까지 꼬박 걸어도 1시간 거리도 안되었던 연인들의 이야기는 아쉬움 속에 깊어가기도 했어. 별빛은 5월을 더욱 향기롭게 하는지, 그시절의 노래가 생생하게 살아있으리라 믿으면서 아카시아 흐드..

시(詩)와 詩魂 2024.04.28

5월의 창 / 황금찬

5월의 창 / 황금찬5월은 푸르러 가는 내 창 앞에 와서한 밤을 말이 없다가새벽이 되면 정다운 음성으로나를 부르는 것이다.비가 오는 언덕에는어느 바레트의 채색처럼풍경화를 수놓고 있는데그것을 이 창 안에서 바라보기란마음의 부담으로 하여시계가 흐른다.5월은 누가 간 달이냐다시 누가 올 달이라더냐아카시아 꽃이 비를 맞으며서 있는 것은 내 창으로 봐액자 속의 그림 같다.5월의 창은 언제나미술전시회장의 입구처럼기대가 크고,무도회의 권유를 연주하고 있다.5월의 내 창을 통해 보면고호의 그림폭이 나열되고스테파노가 부르는 무정한 사람이 들리고때로는 가부리엘라 뚜치의 소프라노가 감돌기도 한다.5월의 창은 참 말이 없다.그리고 그 낮은 음석으로 해서다정한 풍경화와조용한 음률을 생각하는내 하나의 유산이다.

시(詩)와 詩魂 2024.04.28

5월 / 이해인

5월 / 이해인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모두 초록빛 기도로 물이 드는 5월,어머니를 부르는 저희 마음에도초록의 숲이 열리고 바다가 열립니다매일 걸어가는 삶의 길에서마음이 어둡고 시름에 겨울 때지친 발걸음으로 주저앉고 싶은 때어서 들어오라고 저희를 초대하시는지혜의 문이신 어머니새 천년의 삶을 준비하며저희는 어머니가 열어주시는그 문으로 들어가살아가는 지혜를 다시 배우고 싶습니다어떤 유혹에도 흔들림 없이진리를 선택하고 진리를 따르는지혜와 용기를 배우고 싶습니다어둠을 비추는 별이 되라고오늘도 조용히 저희를 부르시는바다의 별이신 어머니벼랑 끝으로 내몰린 위기에도쉽게 쓰러지지 않고캄캄한 절망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믿음과 희망을 참을성 있게 키워마침내는 한 점 별로 뜰 수 있도록영원의 환한 빛으로 저희를 비추어주소..

시(詩)와 詩魂 2024.04.28

5월은 / 피천득

5월은 / 피천득​​오월은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비취가락지다.​오월은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오월은 모란의 달이다.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신록의 달이다.​전나무의 바늘잎도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신록을 바라다 보면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참으로 줄겁다.​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나는 5월 속에 있다.​연한 녹색은 나날이번져가고 있다.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머문듯 가는 것이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원숙한 여인같이녹음이 우거지리라.​그리고 태양은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지금 가고 있다.

시(詩)와 詩魂 2024.04.28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뼏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는니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시(詩)와 詩魂 2024.04.28

침묵에 대하여

침묵에 대하여 ​ 고재종 ​ 용구산 아래 있는 나의 오래된 우거는 용과 거북이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는 사방이 단단한 침묵으로 둘러쳐 있다 ​ 침묵은 녹슨 함석대문에 붙어 있고 마당가에 비쭉비쭉 솟은 망촛대로 자라고 침묵은, 재선충병에 걸린 뜰의 반송으로 붉어지고 토방에 벗어 둔 검정고무신으로 암암하다 ​ 어느덧 내 몸조차 침묵으로 하나 됐다가 그중 몇 개쯤 파계하여 들고양이로 울다가 때론 용과 거북이가 재림하길 염불하게도 하는 무자비하고 포악한 침묵이란 짐승은 ​ 송송 구멍이 뚫리는 외로움의 골다공증과 사괘가 마구 뒤틀리는 고독의 퇴행성관절염과 바람에 욱신거리는 그리움의 신경통을 앓는 앞집 폐가에 달라붙어 와지끈, 그 근골이 주저앉을 때까지 시간의 공적(空寂)에 대하여 더는 묻지도 않는다 ​ 침묵의 폐..

시(詩)와 詩魂 2024.03.31

출렁거림에 대하여 / 고재종

출렁거림에 대하여 ​ 고재종 ​ 너를 만나고 온 날은, 어쩌랴 마음에 반짝이는 물비늘 같은 것 가득 출렁거려서 바람 불어오는 강둑에 오래오래 서 있느니 잔 바람 한 자락에도 한없이 물살 치는 잎새처럼 네 숨결 한 올에 내 가슴별처럼 희게 부서지던 그 못다 한 시간들이 마냥 출렁거려서 내가 시방도 강변의 조약돌로 일렁이건 말건 내가 시방도 강둑에 패랭이꽃 총총 피우건 말건 ​

시(詩)와 詩魂 2024.03.31

봄 마당에서 한나절 / 고재종

봄 마당에서 한나절 ​ 고재종 ​ 하늘은 쪽빛이고 마당은 환하다. 햇병아리 몇 마리가 무언가를 콕콕 찍고 토방의 늙은 개가 그걸 물끄러미 쳐다본다. 나도 세상 살며 바람에 꾸벅이는 제비꽃이나 처마 밑에 떨어진 참새 주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 잦아진다. 담 너머 대숲의 고요 모르는 수런거림과 사립 옆 윤기 나는 감나무 잎의 반짝거림에, 한때는 목숨이라도 걸 듯 그리움과 노여움을 옹호하기도 했던 것이다. 먹이 모자라던 까치 지난 겨울엔 개밥 그덩에까지 내려와 어슬렁거리더니 그 까치 시방은 마당을 차고 오르며 흰 무늬 날개 활짝 펴서 대숲 위를 다닌다. 그 부신 꿈의 비상엔 언제나 차고 오를 마당과 몇 알의 밥알이 필요했던 것인데, 나는 시방 생의 어디쯤 어슬렁거리며 날개 짓 해보는 것인가. 마당은 환하..

시(詩)와 詩魂 2024.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