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 박정대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 박정대 ​ 바보 같은 로맹 가리, 영혼의 발전소를 짓겠다니! 차라리 나는 별을 노래하겠어, 깊은 어둠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새 그러나 가령 톱밥난로의 첫 페이지, 스웨터의 두 번째 영혼 그리고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같은 거 그래서 나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들으며 글을 쓰네, 담배를 피우네, 담배를 피우면 자꾸만 그대 생각이 나 시커먼 커피를 마시네 나는 빈곤과 허탈의 대지에서 왔네 심장의 내륙에서 혹한의 영혼까지 바람을 거슬러 오르는 횡단의 어려움, 집시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 나는 무모한 패관, 나는 생의 백지위임장을 들고 몽상과 연민이 끝난 저 먼 대지로부터 왔네 생은 마치 처절한 화학반응과도 같아서 실패한 실험처럼 황폐하게 돋아난 낡은 시간의 깃발이 여기..

시(詩)와 詩魂 2023.09.24

어떤 저항의 멜랑콜리 / 박정대

어떤 저항의 멜랑콜리 ― 프렌치 얼 그레이 백작에게 박정대 오늘은 날이 흐려 저녁이 너무 일찍 찾아 왔다 낡은 녹색의자에 기대어 앉아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듣는다 창가의 산국화 바람에 흔들리는 저녁 말안장 위에 작은 등불을 밝히고 오랜 동무가 써 보낸 글을 읽노라면 조금씩 어두워지다 다시 화안하게 밝아지는 저녁 그대는 잘 있는지 난 하루에 밥은 한끼 산책하고 글 쓰고 가끔 책을 읽기도 해 요즘은 해 질 녘도 좋고 동 틀 무렵도 좋더라 밤새 꼼지락거리다 맞이하는 아침의 햇살과 바람, 그런 게 밤과 낮을 이루는 소립자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게 삶과 시의 본질적 성분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물리적 고립이 형성하는 공간, 감정의 고독을 유지하기 위한 시간의 사용, 그 런 걸 나는 저항의 멜랑콜리라 부른..

시(詩)와 詩魂 2023.09.24

시인박멸 / 박정대

시인박멸 박정대 어떤 영화감독은 시나리오도 없이 촬영에 들어갔다 훌륭하다. 어떤 시인은 제목없이 시를 쓴다 역시 훌륭하다. 제목만으로 완성되는 시가 있듯 제목만으로 완성되는 삶도 있다 제목이 부실하다는 것은 삶이 부실하다는 것 오늘은 그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삶의 제목으로 삼아라 삼나무에서 삼나무 이파리가 자라듯 제목으로부터 삶이 자란다 고독이 분란을 일으키는 삶은 선반 위에 올려두어라 싸늘한 겨울 오후 난롯가에서 그대 시를 쓴다면 제목을 커피와 담배라고 하자 그 모든 성분은 삶으로부터 온 것일지니 커피와 담배의 시는 삶의 시다 담벼락과 마주한 그대 삶의 시를 보아라 처음부터 완성된 시는 없나니

시(詩)와 詩魂 2023.09.24

구관조 씻기기 /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 황인찬 이 책은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새를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비현실적으로 쾌청한 창밖의 풍경에서 뻗어 나온 빛이 삽화로 들어간 문조 한 쌍을 비춘다 도서관은 너무 조용해서 책장을 넘기는 것마저 실례가 되는 것 같다 나는 어린 새처럼 책을 다룬다 “새는 냄새가 거의 나지 않습니다. 새는 스스로 목욕하므로 일부러 씻길 필요가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었다 새를 키우지도 않는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어째서였을까 “그러나 물이 사방으로 튄다면, 랩이나 비닐 같은 것으로 새장을 감싸 주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긴 복도를 벗어나 거리가 젖은 것을 보았다

시(詩)와 詩魂 2023.09.24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 황인찬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황인찬 황인찬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시(詩)와 詩魂 2023.09.24

조개 무덤 / 허연

조개 무덤 - 허연 여자애는 솔새만큼이나 작았지만 바다만큼 눈물을 가지고 있었다. 바다를 처음 봤던 날 방파제 보안등 아래서 우리는 솜털을 어루만지며 울었다 그날 여자애의 동공 속에서 두려운 세월을 보았고, 얼마 안 가 그 세월이 파도에 쓸려가는 걸 봤다 살고 싶을 때 바다에 갔고, 죽고 싶을 때도 바다에 갔다. 사라질세라 바다를 가방에 담아 왔지만 돌아와 가방을 열면 언제나 바다는 없었다 상처를 훑고 간 바닷물이 절벽에 밀회를 그려 넣었고 몇 해가 흘렀다. 그 옆엔 은밀한 새들이 둥지를 틀었고 파도는 뼛속에도 결을 남겼다. 잊어버릴 재주는 없었다. 바다는 우리들의 패총이었다

시(詩)와 詩魂 2023.06.28

저녁나절/박형준

저녁나절 - - 박형준 반지하 창문 앞에는 늘 나무가 서 있었지 그런 집만 골라 이사를 다녔지 그 집들은 깜빡 불 켜놓고 나온 줄 몰랐던 저녁나절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었던가 산들바람이 부는 저녁에 집 앞에서 나는 얼마나 많이 서성대며 들어가지 못했던가 능금나무나 살구나무가 반지하 창문을 가리던 집, 능금나무는 살구나무는 산들바람에 얼마나 많은 나뭇잎과 꽃잎을 가졌는지 반지하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떨어지기만 했지 슬픔도 환할 수 있다는 걸 아무도 없는데 환한 저녁나절의 반지하집은 말해주었지 ​ 불 켜진 저녁나절의 창문을 보면 아직도 나는 불빛에 손끝이 가만히 저린다

시(詩)와 詩魂 2023.06.28

자세 / 허연

자세 / 허연​ ​ 위대한 건 기다림이다. 북극곰은 늙은 바다코끼리가 뭍에 올라와 숨을 거둘 때까지 사흘 밤낮을 기다린다. 파도가 오고 파도가 가고, 밤이 오고 밤이 가고. 그는 한생이 끊어져가는 지루한 의식을 지켜보며 시간을 잊는다. ​ 그는 기대가 어긋나도 흥분하지 않는다. 늙은 바다코끼리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먼바다로 나아갈 때. 그는 실패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 다시 살아난 바다코끼리도, 사흘 밤낮을 기다린 그도, 배를 곯고 있는 새끼들도, 모든 걸 지켜본 일각고래도 이곳에서는 하나의 '자세'일 뿐이다. ​ 기다림의 자세에서 극을 본다. ​ 근육과 눈빛과 하얀 입김. 백야의 시간은 자세들로 채워진다. ​

시(詩)와 詩魂 2023.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