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고요를 시청하다 / 고재종

고요를 시청하다 ​ 고재종 ​ 초록으로 쓸어놓은 마당을 낳은 고요는 새암가에 뭉실뭉실 수국송이로 부푼다 ​ 날아갈 것 같은 감나무를 누르고 앉은 동박새가 딱 한 번 울어서 넓히는 고요의 면적, 감잎들은 유정무정을 죄다 토설하고 있다 ​ 작년에 담가둔 송순주 한 잔에 생각나는 건 이런 정오, 멸치국수를 말아 소반에 내놓던 어머니의 소박한 고요를 윤기 나게 닦은 마루에 꼿꼿이 앉아 들던 아버지의 묵묵한 고요, ​ 초록의 군림이 점점 더해지는 마당, 담장의 덩굴장미가 내쏘는 향기는 고요의 심장을 붉은 진동으로 물들인다 ​ 사랑은 갔어도 가락은 남아, 그 몇 절을 안주 삼고 삼베올만치나 무수한 고요를 둘러치고 앉은 고금孤衾의 시골집 마루, ​ 아무것도 새어 나게 하지 않을 것 같은 고요가 초록바람에 반짝반짝 누..

시(詩)와 詩魂 2024.03.31

정천한해(情天恨海)/한용운

정천한해(情天恨海) - 한용운 가을 하늘이 높다기로 정(情)하늘을 따를소냐. 봄바다가 깊다기로 한(恨)바다만 못하리라. 높고 높은 정(情)하늘이 싫은 것만 아니지만 손이 낮아서 오르지 못하고 깊고 깊은 한(恨)바다가 병될 것은 없지마는 다리가 짧아서 건너지 못한다. 손이 자라서 오를 수만 있으면 정(情)하늘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다리가 길어서 건널 수만 있으면 한(恨)바다는 깊을수록 묘하니라. 만일 정(情)하늘이 무너지고 한(恨)바다가 마른다면 차라리 정천(情天)에 떨어지고 한해(恨海)에 빠지리라. 아아 정(情)하늘이 높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이마보다는 낮다. 아아 한(恨)바다가 깊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무릎보다는 얕다. 손이야 낮든지 다리야 짜릅던지 정(情)하늘에 오르고 한(恨)바다를 건너려면 님에게만..

시(詩)와 詩魂 2023.09.24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 근원을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시(詩)와 詩魂 2023.09.24

가난한 이름에게 / 김남조

가난한 이름에게 -김남조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여인을 만나지 못해 당신도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까 검은 벽의 검은 꽃 그림자 같은 어두운 향로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겨울 밤 고독 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어딘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때로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 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라는 가난한..

시(詩)와 詩魂 2023.09.24

관념 / 이준규

관념 -이 준규 ​ 관념은 조금 빈 잔이고 모서리가 있다. 모든 관념은 딱딱한 모서리를 가진다. 바람은 불었다. 언덕은 부드럽게 무너진다. 나는 언덕 아래로 내려가 언덕 위를 바라보는 하나의 뚜렷한 관념이었다. 관념은 두부 같고 관념은 두부를 찍어 먹는 간장 같아서 나는 조랑말을 끌고 산을 넘었다. 만두가 있을 것이다. 관념적인 만두. 봄이다. 강은 향기롭다. 봄이고 강은 향기롭고 홍머리오리는 아직 강을 떠나지 않는다. 흰죽지도 그렇다. 물 위엔 거룻배. 하늘엔 헬리콥터. 그것은 모두 사라진다. 관념적인 동그라미와 함께. 어떤 연인들처럼. 비처럼. 눈물처럼. 봄은 향기롭다. 나는 길을 갔다. 어려운 네모와 함께. 아네모네를 물고. 너를 향하여. 언제나 그윽한 너를 향하여. 너의 잔을 마시러. 나는 길을 ..

시(詩)와 詩魂 2023.09.24

얼굴 / 이준규

얼굴 - 이준규 ​ 너의 얼굴이 흐른다. 너의 얼굴이 비낀다. 너의 거울. 너의 얼굴. 나는 너의 얼굴을 찾아 세상을 떠돌았다. 낙엽이 흐를 때. 새가 솟을 때. 나는 어디에서나 너의 얼굴을 만졌다. 나는 어디에서나 너의 얼굴 안에 있었다. 아무것도 지우지 못했다. 너는 언제나 잊히는 얼굴 하나였다. 나는 그날 너의 얼굴을 걸었다. 바람은 같았다.

시(詩)와 詩魂 2023.09.24

복도 / 이준규

복도 / 이준규 복도는 복도다, 복도는 걸어갈 수 있고, 복도는 서서 끝을 볼 수 있다, 복도는 너를 사랑한다, 복도는 말이 없고, 겨울밤의 복도는 조금 미쳐 있다, 복도에는 달빛이 흐르지 않고, 가로등빛이 흐르지 않고 복도의 불빛이 흐른다, 그것들은 흐르는 것들이다, 나는 복도의 끝에서 복도의 끝을 본다, 문을 열면서, 복도의 끝을 바라보면, 그 끝은, 어떤 아가리 같다, 용광로, 조금 떠서 날아가면 그 용광로에 삼켜질 수 있을 것 같은, 나는 너를 생각한다, 나는 그를 생각한다, 조금 미쳐서, 고개를 숙이고, 어떤 감동이 있는가, 누구에게도 묻지 않는다, 복도에는 창이 있고, 창밖에는 나무가 있고, 나무의 밖에는 세상이 있고, 세상의 밖에는 망설임이 있고, 망설임의 밖에는 황당함이 있고, 황당함의 밖..

시(詩)와 詩魂 2023.09.24

오십미터 / 허연

오십미터 / 허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

시(詩)와 詩魂 2023.09.24

하얀 당신 / 허연

하얀 당신/ 허연 어떻게 검은 내가 하얀 너를 만나서 함께 울 수 있겠니 죄는 검은데 네 슬픔은 왜 그렇게 하얗지 드물다는 남녘 강설强雪의 밤. 천천히 지나치는 창밖 에 네가 서 있다 모든 게 흘러가는데 너는 이탈한 별처 럼 서 있다 선명해지는 너를 지우지 못하고 교차로에 섰다 비상등은 부정맥처럼 깜빡이고 시간은 우리가 살 아낸 모든 것들을 도적처럼 빼앗아 갔는데 너는 왜 자 꾸만 폭설 내리는 창밖에 하얗게 서 있는지 너는 왜 하 얗기만 한지 살아서 말해달라고? 이미 늦었지 어떻게 검은 내가 하얀 너를 만나서 함께 울 수 있겠니 재림한 자에게 바쳐졌다는 종탑에 불이 켜졌다 피할 수 없는 날들이여 아무 일 없는 새들이여 이곳에 다시 눈이 내리려면 20년이 걸린다

시(詩)와 詩魂 2023.09.24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허연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시(詩)와 詩魂 2023.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