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원추리와 능소화의 힘으로/신달자

원추리와 능소화의 힘으로 신달자 무릎이 아픈데도 조금은 절룩거리면서 50분을 걸었다 무슨 힘으로? 추억의 힘으로 원추리가 아침 노을을 이야기하고 능소화가 여름 이야기를 줄줄이 타고 오르며 저녁 노을의 극점에서 숨을 몰아쉬는 원추리 한 송이 손에 쥐었는데 가슴에서 피어나고 능소화 주황빛 손길은 덮은 생의 그늘을 찬란하게 살아 나르게 하고 빛으로 솟구쳐 오르게 하고 마흔 속으로 젊은 혈기 속으로 나른하게 완결의 미소를 날리며 걷고 있네 딱 50분이 아니라 그 이상 추억이라는 한 사람이 하늘의 힘으로 뜨겁게 손 잡아 주고……

시(詩)와 詩魂 2023.06.28

궁금한 일 – 박수근의 그림에서/장석남

장석남, 「궁금한 일 – 박수근의 그림에서」 인쇄한 박수근 화백 그림을 하나 사다가 걸어놓고는 물끄러미 그걸 치어다보면서 나는 그 그림의 제목을 여러 가지로 바꾸어보곤 하는데 원래 제목인 ‘강변’도 좋지마는 ‘할머니’라든가 ‘손주’라는 제목을 붙여보아도 가슴이 알알한 것이 여간 좋은 게 아닙니다. 그러다가는 나도 모르게 한 가지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가 술을 드시러 저녁 무렵 외출할 때에는 마당에 널린 빨래를 걷어다 개어놓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 빨래를 개는 손이 참 커다랬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장엄하기까지 한 것이어서 성자의 그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는 멋쟁이이긴 멋쟁이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또한 참으로 궁금한 것은 그 커다란 손등 위에서 같이 꼼지락거렸을 햇빛들이며는 그가 죽은 후에 그를 쫓..

시(詩)와 詩魂 2023.06.28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이해인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 -이해인 7월은 나에게 치자꽃 향기를 들고 옵니다 ​ 하얗게 피었다가 질 때는 고요히 노랗게 떨어지는 꽃 ​ 꽃은 지면서도 울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눈물을 흘리는 것일 테지요 ​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모든 사람들을 꽃을 만나듯이 대할 수 있다면 ​ 그가 지닌 향기를 처음 발견한 날의 기쁨을 되새기면서 설레일 수 있다면 ​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 삶 자체가 하나의 꽃밭이 될테지요 ​ 7월의 편지 대신 하얀 치자꽃 한송이 보내는 오늘 내 마음의 향기도 받으시고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어 향기로운 나날 되십시요 ​

시(詩)와 詩魂 2023.06.28

단 하나의 이름 / 이제니

단 하나의 이름 / 이제니 ​ 얼어붙은 종이 위에서 나는 기다린다 얼음의 결정으로 떠오르는 기억의 물처럼 발설하지 않은 이름을 대신할 풍경이 몰려올 때까지 ​ 월요일에 나는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지 아니 화요일 아니 수요일 아니 목요일 아니 금요일 이미 잃었는데도 다시 잃고야 마는 요일의 순서들처럼 수면양말에 담긴 너의 두 발은 틀린 낱말만 골라 디뎠지 이곳은 너무 어둡고 너무 환하고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다 이 흰색을 이 검은색을 고아라고 부를 수도 있을까 사랑하는 나의 고아에게 오늘의 심장은 어제의 심장이 아니란다 건초더미라는 말은 녹색의 풀이 한 계절을 지나왔다는 말 세계의 끝으로 밀려난 먼지들의 춤도 이와 마찬가지 소리가 되기 위해 모음이 필요한 자음들처럼 이제 그만 울어도 좋단다 말없는 자매들처..

시(詩)와 詩魂 2023.06.11

얼굴은 보는 것/이제니

얼굴은 보는 것/이제니 ​ 거울은 다만 빛이 부족한 것 따뜻함은 이미 넘치고 넘치는 것 뒤돌아가면 왔던 길이 남아 있다 다시 되돌아가면 제자리로 돌아온다 새가 새를 나무가 나무를 구름이 구름을 불러 모으듯 어떤 믿음이 너와 나를 구별되게 했다 믿고 싶어서 믿기 시작하다 보면 믿지 않아도 믿게 되는 순간이 온다고 나는 나를 속이고 있었다 네가 너를 속이고 있듯이 그러니까 오늘 밤은 멀리멀리로 가자 아름다움 앞에서는 죽어도 상관없는 얼굴로 축제의 깃발을 흔드는 기분으로 우리는 아주 작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는데 얼굴과 얼굴로 오래오래 가만히 마주 보는 것은 아무래도 사람과 사람의 일이었다고 그러니까 얼굴은 마주 보는 것 마음은 서로 나누는 것 사람은 우는 것 사랑은 하는 ..

시(詩)와 詩魂 2023.06.11

눈 위의 앵무/이제니

눈 위의 앵무/이제니 소화꽃 피던 밤 눈 위의 앵무는 붉은 깃털을 세우고 영원의 길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내가 바라보는 곳은 눈길 저 너머. 이곳에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의 낡은 호주머니 속 한가닥 보푸라기를 만지는 심정으로. 나는 우리가 즐겨했던 끝말잇기의 궤적을 그려보려는 헛되고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밤 눈 위의 앵무는 자신의 그림자를 끌고 날아오르려 날아오르려. 반성하는 습관을 버린다면 나는 좋은 사람이 될 텐데. 앵무의 발은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부드러운 치자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우리는 꽃의 향기를 맡을 줄 압니다. 우리는 그리운 곳으로 손을 뻗을 줄 압니다. 네가 말하자 눈 위의 앵무는 눈썹 위의 물방울을 털어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 내듯 길고 흐릿한 점선의 방..

시(詩)와 詩魂 2023.06.11

그믐으로 가는 검은 달 / 이제니

그믐으로 가는 검은 달 / 이제니 꿈을 꾸고 있었다 구두를 잃어버린 사람이 울고 있었다 북해의 지명을 수첩에 적어넣었다 일광의 끝을 따라 죽은 사람처럼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밤 전무한 추락처럼 검은 새는 날아올랐다 언덕에 앉아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휘파람을 불려고 애쓰는 사이 그 사이 흉터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너의 손목에 그어진 열십자의 상처였다 한번 울고 한번 절할 때 너의 이마는 어두워졌다 쓸모없는 아름다움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바닥에 앉아 꽃을 파는 중국인 자매를 보았다 모로코나 알제리 사람인지도 모르지 이미 죽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비밀을 지킬 수 있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가 누군가를 비난할 때 그것이 너 자신의 심장을 ..

시(詩)와 詩魂 2023.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