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허니밀크랜드의 체크무늬 코끼리/유형진

「허니 밀크 랜드의 체크무늬 코끼리」 - 유형진 그녀는 사랑이 깨지는 순간을 본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순간을 그녀는 자주 목도(目睹)한다//사랑이 어떻게 깨지는지/깨진 사랑이 어떻게 가루가 되는지/가루가 된 사랑이 어떻게 녹는지/녹은 사랑이 어떻게 질척해 지는지/그 질척한 사랑이 그리는 마블링을/목도한다//녹아도 녹지 않고/ 깨져도 깨지지 않는/어떤 알갱이들이 만들어주는/그 오묘한 무늬를/체크무늬 코끼리/그녀는 본다//사랑의 마블링을 볼 줄 아는 그녀는/그래서 슬프고 아름다운데/정작 그녀를 아무도 볼 수 없다는 것이/이 세계의 비극//허나 이 세계의 비극은 이것 말고도/몇 개는 더 있는데/더 큰 비극은 그 비극을 이야기하기에 시간은/산장에 사는 검은 고양이의 털만큼/셀 수 없다는 것이다 --------..

시(詩)와 詩魂 2022.05.12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유형진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유형진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 겨울이면 나타나는 별자리 이름의 제과회사에서 만든 것이었다 질 나쁜 노란색의 누가코팅 속에는 비누 거품같이 하얀 머시멜로가 들어 있었다 그 말랑하고 따뜻한 느낌, 달콤하고 옅은 바나나 향이 혀에 자꾸 들러붙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짝짝이 단화를 신고 다녔다 연탄불에 말려 신던 단화는 아주 미세한 차이로 색이 달랐다 아이보리와 흰색의 저만치 앞에서 보면 짝짝이라고 할 수 도 없는 그런 단화. 아이보리색의 오른쪽 신발은 유한락스에 며칠이고 담가 놓아도 여전히 그런 색이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우물이 제일 무서웠다 우물에 빠져 죽은 아이의 꿈을 날마다 꾸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 없는 아이였고 아이를..

시(詩)와 詩魂 2022.05.12

죄책감 퀼트대회/유형진

마트료시카 시침핀 연구회 3 /유형진. ㅡ 죄책감 퀼트대회 이번 가을, ‘마트료시카 시침핀 연구회’ 주최로 죄를 모르는 자들의 죄편(罪片)을 잘라 이어붙이는 가 열렸습니다. #마름질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 수 없는 귀뚜라미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한 마리는 두더지를 닮아서 두더지귀뚜라미, 다른 한 마리는 박쥐를 닮아서 박쥐귀뚜라미로 불립니다. 두더지귀뚜라미는 손을 쓰고, 박쥐귀뚜라미는 발을 써서 웁니다. 이들은 한때 거짓말을 잘하는 피노키오들의 양심 역할을 했었는데, 요즘 피노키오들에겐 양심이 붙은 채 생산되기 때문에 수공을 들여 하나씩 뽑히는 귀뚜라미들은 이 시스템에선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대량으로 생산되는 양심들 중엔 불량도 많아 ‘죄책감’을 모르는 피노키오들이 적지 않게 거리를 ..

시(詩)와 詩魂 2022.05.12

우유는 슬픔 기쁨은 조각보​/유형진

우유는 슬픔 기쁨은 조각보 ​ ​ ​ 유형진 ​ ​ ​ ​ 우유 사러 갈게, 하고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여자가 있다 ​ 생각해보니 여자는 우유 사러 갔다 올게, 하지 않고 우유 사러 갈게, 그랬다 그래서 여자는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 ​ ​ 우유는 슬픔 기쁨은 조각보 ​ ​ 왜? ​ 슬픔은 뿌옇게 흐르고 썩으면 냄새가 고약하니까 ​ 나에게 기쁨은 늘 조각조각 꿀이 든 벌집 모양을 기워놓은 누더기 같아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전혀 기억나지 않는 말 지금 기억나는 말 ​ 그때 무얼 하고 있었지?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 ​ 조각보로 덮어둔 밀크 잼 바른 토스트를 먹으며 ​ ​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재방송 드라마가 하고 있었고 주인공이 막 오래된 마음을 고백하려는 중이었다 고백은 끝나고 키스도 끝났는데..

시(詩)와 詩魂 2022.05.12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유형진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유형진 과꽃의 씨방에 사는 한 사람을 압니다 그는 분홍과꽃의 말라비 틀어진 씨방에 삽니다 그의 등은 호미처럼 굽었고 손등은 딱정벌 레의 껍질처럼 딱딱합니다 그의 등과 손등이 언제부터 그렇게 굽 고 딱딱해졌는지 모릅니다 과꽃 잎사귀에 이슬이 내릴 때 그는 꽃잎을 타고 일터로 갑니다 그의 일터는 프라모델 탱크를 만드는 공장입니다 그는 탱크의 바퀴를 만드는 일을 합니다 그가 만든 탱크 바퀴는 과꽃을 닮았습니다 그는 탱크 바퀴의 전문가입니다 그가 만든 탱크 바퀴는 진흙탕도 달릴 수 있습니다 비탈언덕도 쉽게 오를 수 있습니다 과꽃의 씨방에 사는 그는 과꽃을 타고 출 근해서 과꽃 같은 탱크 바퀴를 만듭니다 톱니가 있고, 굴러가고, 아이들이 좋아하고, 쉽게 잊혀지고, 잊은 후에는 다시 떠오..

시(詩)와 詩魂 2022.05.12

고요/오규원

고요 오규원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 바람이 나무 밑에서 그림자를 흔들어도 고요는 고요하다 비비추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 있고 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 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 창 앞의 장미 한 송이는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 고요로 지고 있다 ------------------- 예전에 올렸던 시다. '고요'한 절창이다. 좋아서 또 올려본다.

시(詩)와 詩魂 2022.05.12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오규원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오규원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 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만의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시(詩)와 詩魂 2022.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