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순례의 서/오규원

순례의 서 오규원 종일 바람에 귀를 갈고 있는 풀잎. 길은 늘 두려운 이마를 열고 우리들을 멈춘 자리에 다시 멈추게 한다. 막막하고 어지럽지만 그러나 고개를 넘으면 전신이 우는 들. 그 들이 기르는 한 사내의 편애와 죽음을 지나 먼 길의 귀속으로 한 사람씩 낯 들어가는 영원히 집이 없을 사람들. 먼 길의 귀속으로 한 사람씩 낯 들어가는 영원히 집이 없을 사람들. 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겠다. 무엇인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 속에서 홀로 나부끼는 옷자락은 나를 오래 어두운 그림자로 길가에 세워 두는 것은 그리고 무엇인가 단 한마디의 말로 나를 영원히 여기에서 떨게 하는 것은 멈추면서 그리고 나아가면서 나는 저 무엇인가를 사랑하면서

시(詩)와 詩魂 2022.05.12

하늘과 침묵/오규원

하늘과 침묵 오규원 온몸을 뜰의 허공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고 한 사내가 하늘의 침묵을 이마에 얹고 서 있다 침묵은 아무 곳에나 잘 얹힌다 침묵은 돌에도 잘 스민다 사나의 이마 위에서 그리고 이마 밑에서 침묵과 허공은 서로 잘 스며서 투명하다 그 위로 잠자리 몇 마리가 좌우로 물살을 나누며 사내 앞까지 와서는 급하게 우회전해 나아간다 그래도 침묵은 좌우로 갈라지지 않고 잎에 닿으면 잎이 되고 가지에 닿으면 가지가 된다 사내는 몸 속에 있던 그림자를 밖으로 꺼내 뜰 위에 놓고 말이 없다 그림자에 덮인 침묵은 어둑하게 누워 있고 허공은 사내의 등에서 가파르다

시(詩)와 詩魂 2022.05.12

비가와도 젖은 자는/오규원

비가와도 젖은 자는 오규원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 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 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시(詩)와 詩魂 2022.05.12

꽃과 그림자/오규원

꽃과 그림자 오규원 붓꽃이 무리지어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위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왼쪽과 오른쪽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왼쪽에 핀 둘은 서로 붙들고 보랏빛입니다 그러나 가운데 무더기로 핀 아홉은 서로 엉켜 보랏빛입니다 그러나 오른쪽에 핀 하나와 다른 하나는 서로 거리를 두고 보랏빛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붓꽃들이 그림자를 바위에 붙입니다 그러나 그림자는 바위에 붙지 않고 바람에 붙습니다

시(詩)와 詩魂 2022.05.12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오규원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오규원 씨앗은 씨방에 넣어 보관하고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있는 바람은 잔디 위에 내려놓고 밤에 볼 꿈은 새벽 2시쯤에 놓아두고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는 일이다 가을은 가을텃밭에 묻어 놓고 구름은 말려서 하늘 높이 올려놓고 몇송이 코스모스를 길가에 계속 피게 해놓고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다가오는 겨울이 섭섭하지 않도록 하루 한 걸음씩 하루 한 걸음씩 마중가는 일이다

시(詩)와 詩魂 2022.05.12

개봉동과 장미/오규원

개봉동과 장미 오규원 개봉동 입구의 길은 한 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 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장미는 길을 제 혼자 가게하고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보라 가끔 몸을 흔들며 잎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장미는 이곳 주민이 아니어서 시간 밖의 서울의 일부이고, 그대와 나는 사촌(四寸)들 얘기 속의 한 토막으로 비 오는 지상의 어느 발자국에나 고인다. 말해 보라 무엇으로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두드려 보라 개봉동 집들의 문은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다.

시(詩)와 詩魂 2022.05.12

5월의 시/이해인

5월의 시/이해인 풀잎은 풀잎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축복의 서정시를 쓰는 오월 하늘이 잘보이는 숲으로 가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게 하십시오 피곤하고 산문적인 일상의 짐을 벗고 당신의 샘가에서 눈을 씻게 하십시오 물오른 수목처럼 싱싱한 사랑을 우리의 가슴속에 퍼올리게 하십시오 말을 아낀 기도속에 접어둔 기도가 한송이 장미로 피어나는 오월 호수에 잠긴 달처럼 고요이 앉아 불신했던 날들을 뉘우치게 하십시오 은총을 향해 깨어있는 지고한 믿음과 어머니의 생애처럼 겸허한 기도가 우리네 가슴속에 물 흐르게 하십시오 구김살 없는 햇빛이 아낌없이 축복을 쏟아내는 오월 어머니 우리가 빛을 보게 하십시오 욕심 때문에 잃었던 시력을 찾아 빛을 향해 눈뜨는 빛의 자녀가 되게 하십시오

시(詩)와 詩魂 2022.04.30

그 5월에 / 곽재구

그 5월에 / 곽재구 자운영 흐드러진 강둑길 걷고 있으면 어디서 보았을까 낯익은 차림의 사내 하나 강물 줄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염색한 낡은 군복 바지에 철 지난 겨울 파커를 입고 등에 맨 배낭 위에 보랏빛 자운영 몇 송이 꽃혀 바람에 하늘거린다 스물 서넛 되었을까 여윈 얼굴에 눈빛이 빛나는데 어디서 만났는지 알지 못해도 우리는 한 형제 옷깃을 스치는 바람결에 뜨거운 눈인사를 한다 그 오월에 우리는 사랑을 찾았을까 끝내 잊었을까 되뇌이는 바람결에 우수수 자운영 꽃잎들이 일어서는데 그 오월에 진 꽃들은 다시 이 강변 어디에 이름도 모르는 조그만 풀잡맹이들로 피어났을까 피어나서 저렇듯 온몸으로 온몸으로 봄 강둑을 불태우고 있을까 돌아보면 저만치 사내의 뒷모습이 보이고 굽이치는 강물 줄기를 따라 자운영 꽃들만 ..

시(詩)와 詩魂 2022.04.30

5월의 사랑/ 송수권

5월의 사랑/ 송수권 누이야 너는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가 오월의 저 밝은 산색이 청자를 만들고 백자를 만들고 저 나직한 능선들이 그 항아리의 부드러운 선들을 만들 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누이야 너 또한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네 사는 마을 저 떠도는 흰구름들과 앞산을 깨우는 신록들의 연한 빛과 밝은 빛 하나로 넘쳐흐르는 강물을 너 또한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푸른 새매 한 마리가 하늘 속을 곤두박질하며 지우는 이 소리 없는 선들을, 환한 대낮의 정적 속에 물밀듯 터져오는 이 화녕끼 같은 사랑을 그러한 날 누이야, 수틀 속에 헛발을 딛어 치맛말을 풀어 흘린 춘향이의 열두 시름 간장이 우리네 산에 들에 언덕에 있음직한 그 풀꽃 같은 사랑 이야기가 절로는 신들린 가락으로 넘쳐흐르지 않겠는가 저 월매의..

시(詩)와 詩魂 2022.04.30

오월은 / 피천득

오월은 - 피천득 ​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 스물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 得了愛情痛苦(득료애정통고,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실료애정통고,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 내 나이를 세어 ..

시(詩)와 詩魂 2022.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