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시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 이어령

시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 이어령 시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하거라. 운율은 출렁이는 파도에서 배우고 음조의 변화는 저 썰물과 밀물을 닮아야 한다. 작은 물방울의 진동이 파도가 되고 파도의 융기가 바다 전체의 해류가 되는 신비하고 무한한 연속성이여. 시의 언어들을 여름바다처럼 늘 움직이게 하라. 시인의 언어는 늪처럼 썩는 물이 아니다. 소금기가 많은 바닷물은 부패하지 않지만 늘 목마른 갈증의 물 때로는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갈증을 견디며 무거운 짐을 쉽게 나르는 짐승 시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하거라.

시(詩)와 詩魂 2022.04.07

항상 끝을 생각하라/ 발타사르 그라시안

항상 끝을 생각하라/ 발타사르 그라시안 가끔 인생의 끝자락에서 지금을 살펴보라 우리의 삶은 대개 환희의 문을 지나 행운의 문을 거처 마지막에는 쓸쓸한 퇴장의 문을 반드시 거치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그대는 항상 끝을 생각하고 행복하게 될 것을 그려라 처음 들어설 때의 환호성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러한 갈채는 누구나 받는다 그러나 물러설 때 받는 갈채야말로 진정하고 위대하다 왜냐하면 행운이라는 그림자가 물러가는 자의 문까지 따라 나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등장하는 자는 후한 대접을 받으나 퇴장하는 자는 경멸당하기 쉽다

시(詩)와 詩魂 2022.04.07

여행/보들레르

여행/보들레르 지도와 판화를 사랑하는 어린이에게 우주는 그의 왕성한 욕망을 담는 그릇 아! 등잔불 속에 세계는 얼마나 광대한가! 추억의 눈에 세상은 얼마나 작은가! 어느 날 아침 우리는 떠난다, 머리는 뜨겁고 가슴은 원한과 쓰라린 욕망으로 가득 차, 그리고 우리는 간다, 물결을 따라 흘러 유한한 바다 위에 끝없는 마음을 흔들며 그러나 참다운 여행자들은 떠나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 가벼운 마음으로 풍선처럼 주어진 숙명에서 결코 빠져나가지 못하면서 무작정 언제나 가자! 라고 말한다

시(詩)와 詩魂 2022.04.07

먼 길 ... 목필균

먼 길 ... 목필균 내가 갈 길 이리 멀 줄 몰랐네 길마다 매복된 아픔이 있어 옹이진 상처로도 가야할 길 가는 길이 어떨지는 물을 수도 없고, 답하지도 않는 녹록지 않는 세상살이 누구나 아득히 먼 길 가네 낯설게 만나는 풍경들 큰 길 벗어나 오솔길도 걷고 물길이 있어 다리 건너고 먼 길 가네 누구라도 먼 길 가네 때로는 낯설게 만나서 때로는 잡았던 손놓고 눈물 흘리네 그리워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미소짓기도 하며 그렇게 간다네 누구라도 먼 길 가네 돌아설 수 없는 길가네

시(詩)와 詩魂 2022.04.07

공명을 듣다 / 배한봉

공명을 듣다 / 배한봉 ​ ​ 햇살이 산길을 넘어오는 아침 탈골하는 억새들, 음성이 청량하다 살과 피 다 버리고 뼈 속까지 텅 비운 한 생애의 여백 여백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연 담고 있는 것이냐 면도날 같은 잎으로 여름 베어 눕히며 언덕 점령하던 때 지나 흰 꽃 속에 허파에 든 바람 실어 허허허허거리던 시절, 간과 쓸개 빼놓던 굽이를 돌아 비로소 세상에 풀어놓은 넉넉한 정신 바람 찬 산을 넘어온 아침이 내 얼굴을 만진다, 이제 겨우 마흔 몇 넘어야할 고개, 보내야할 계절이 돌아오고 또 돌아와서 숨가쁜 나이 산에 올라 억새들 뼈 속에서 울려나오는 깊고 맑은 공명을 듣는다 내 심중에서도 조금씩 여백이 보이고 누가 마음놓고 들어와 앉아 불어도 좋을 젓대 하나, 가슴뼈 어딘가에 만들어지고 ..

시(詩)와 詩魂 2022.04.07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 서정주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 서정주 아조 할 수 없이 되면 고향을 생각한다.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옛날의 모습들, 안개와 같이 스러진 것들의 형상을 불러일으킨다. 귓가에 와서 아스라이 속삭이고는, 스쳐가는 소리들, 머언 유명에서처럼 그 소리는 들려오는 것이나 한 마디도 그 뜻을 알 수는 없다. 다만 느끼는 건 너희들의 숨소리. 소녀여, 어디에서들 안재하는지. 너희들의 호흡의 훈김으로써 다시금 돌아오는 내 청춘을 느낄 따름인 것이다. 소녀여 뭐라고 내게 말하였던 것인가? 오히려 처음과 같은 하늘 우에선 한 마리의 종다리가 가느다란 핏줄을 그리며 구름에 묻혀 흐를 뿐, 오늘도 굳이 닫힌 내 전정의 석문 앞에서 마음대로는 처리할 수 없는 내 생명의 환희를 이해할 따름인 ..

시(詩)와 詩魂 2022.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