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아주 오래 천천히/이병률

아주 오래 천천히 - 이병률 떨어지는 꽃들은 언제나 이런 소리를 냈다 순간 순간 나는 이 말들을 밤새워 외우고 또 녹음하였다 소리를 누르는 받침이 있다는 사실이 좋아서 그 받침이 순간을 받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리고 새벽에 나는 걸어 어느 절벽에 도착하여 그 순간순간의 ㄴ들이 당도할 곳은 있는지 절벽 저 아래를 향해 물었다 이번 생은 걸을 만하였고 파도도 참을 만은 하였으니 태어나면 아찔한 흰분홍으로나 태어나겠구나 그렇다면 절벽의 어느 한 경사에서라면 어떨지 그리하여 내가 떨어질 때는 순간과 순간을 겹겹이 이어 붙여 이런 소리를 내며 순간들 순간들 아주 아주 먼 길을 오래 오래 그리고 교교히 떨어졌으면

시(詩)와 詩魂 2022.03.05

자전거의 연애학 / 손택수

자전거의 연애학 / 손택수 홀아비로 사는 내 늙은 선생님은 자전거 연애의 창안 자다 그에 따르면 유별한 남녀 사이를 자전거만큼 친근 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없다 일단 자전거를 능숙하게 탈 줄 알아야 혀 탈 줄 안다는 것, 그건 낙법과 관계가 있지 나는 주로 하굣길에 여학교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점찍어 둔 가방을 낚아채는 방법을 썼어 그럼 제깐 것이 별수 있 간디, 가방 달라고 죽어라 뛰어오겠지 그렇게만 되면 만 사가 탄탄대로라 이 말이야 지쳐서 더 뛰어오지 못하는 여학생 은근슬쩍 뒤에 태우고 유유히 휘파람이나 불며 달려가면 되는 것이지 뒤에서 허리를 꼭 잡고 놓지 못하 도록 약간의 과속은 필수항목이고, 그렇게 달려가다 갈 대숲이나 보리밭이 나오면 어어어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듣네 이를 어째 가능한 으슥한 곳을..

시(詩)와 詩魂 2022.03.05

사랑의 말/ 김남조

사랑의 말 - 김남조 ​ 1 사랑은 말 하지 않는 말 아침에 단잠을 깨우듯 눈부셔 못견딘 사랑 하나 입술 없는 영혼 안에 집을 지어 대문 중문 다 지나는 맨 뒷방 병풍 너메 숨어사네 ​ 옛 동양의 조각달과 금빛 수실 두르는 별들처럼 생각만이 깊고 말 하지 않는 말 사랑 하나 2 사랑을 말한 탓에 천지간 불붙어 버리고 그 벌이 시키는대로 세상 양끝이 나뉘었었네 한평생 다 저물어 하직삼아 만났더니 아아 천만번 쏟아 붓고도 진홍인 노을 ​ 사랑은 말해버린 잘못조차 아름답구나

시(詩)와 詩魂 2022.03.05

아가(雅歌) / 신달자

아가(雅歌) / 신달자 해가 저물고 밤이 왔다 그러나 그대여 우리의 밤은 어둡지 않구나 바라보는 마음에 따라 어둠은 물처럼 부드럽게 풀려 잘 닦은 거울처럼 앞뒤로 걸려 있거니 그대의 떨리는 눈썹 한 가닥 가깝게 보이누나 밝은 어둠 속에 잠시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나는 글을 쓴다 첫장에 눈부신 그대 이름 절로 밝아오는 하나의 등불 내 생의 찬란한 꽃등이 켜진다 ​ ​

시(詩)와 詩魂 2022.03.05

청 혼/진은영

청 혼 -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시(詩)와 詩魂 2022.03.05

춘설(春雪)/ 정지용

춘설(春雪) / 정지용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멧부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옹숭거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워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 기던 고기 입이 오물거리는, 꽃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

시(詩)와 詩魂 2022.02.22

봄 / 이성부

봄 /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 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시(詩)와 詩魂 2022.02.22

봄 / 황인숙

봄 / 황인숙 온종일 비는 쟁여논 말씀을 풀고 나무들의 귀는 물이 오른다 나무들은 전신이 귀가 되어 채 발음되지 않은 자음의 잔뿌리도 놓치지 않는다 발가락 사이에서 졸졸거리며 작은 개울은 이파리 끝에서 떨어질 이응을 기다리고 각질들은 세례수를 부풀어 기쁘게 흘러 넘친다 그리고 나무로부터 한 발 물러나 고막이 터질 듯한 고요함 속에서 작은 거품들이 눈을 트는 것을 본다

시(詩)와 詩魂 2022.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