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이성복 바다 이성복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나는 아무 대답도 안 했어요 서러움이 날 따라왔어요 나는 달아나지 않고 그렇게 우리는 먼길을 갔어요 눈앞을 가린 소나무 숲가에서 서러움이 숨고 한순간 더 참고 나아가다 불현듯 나는 보았습니다 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 흰 물거품 입에 물고 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내게 손 흔들었습니다 시(詩)와 詩魂 2022.06.16
음악/이성복 음악 이성복 비 오는 날 차안에서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 굳이 내가 살지 않아도 될 삶 누구의 것도 아닌 입술 거기 내 마른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본다 시(詩)와 詩魂 2022.06.16
네가 왜 여기에 어떻게/이성복 네가 왜 여기에 어떻게 -이성복 마라, 네가 왜 여기에, 어떻게 가로등 불빛에 떠는 희부연 길 위에, 기우는 수평선, 기우뚱거리는 하늘 위에 마라, 네가 어떻게, 왜 여기에, 대낮처럼 환한 갈치잡이 배 불빛, 불빛에 아, 내게 남은 사랑이 있다면 한밤에 네게로 몰려드는 갈치떼, 갈치떼 은빛 지느러미, 마라, 네가 왜, 어떻게 여기에 시(詩)와 詩魂 2022.06.16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이성복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이성복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너는 그러나 머물러 흔들려 본 적 없고 돌이켜 보면 피가 되는 말 상처와 낙인을 찾아 고이는 말 지은 죄에서 지을 죄로 너는 끌려가고 또 구름을 생각하면 비로 떨어져 썩은 웅덩이에 고이고 베어먹어도 베어먹어도 자라나는 너의 죽음 너의 후광 너는 썩어 시가 될 테지만 또 네 몸은 울리고 네가 밟은 땅은 갈라진다 날으는 물고기와 용암처럼 가슴속을 떠돌아다니는 새들, 한 바다에서 서로 몸을 뜯어먹는 친척들(슬픔은 기쁨을 잘도 낚아채더라) 또 한 모금의 공기와 한 모금의 물을 들이켜고 너는 네가 되고 네 무덤이 되고 이제 가라, 가서 오래 물을 보고 네 입에서 물이 흘러나오거나 오래 물을 보고 네 가슴이 헤엄치도록 이제 가라, 불온한 도.. 시(詩)와 詩魂 2022.06.16
숨길 수 없는 노래/이성복 숨길 수 없는 노래 이성복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 못했기 때문이다 봄 하늘 가득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음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 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시(詩)와 詩魂 2022.06.16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이성복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이성복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짝짝인 신발 벗어들고 산을 오르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보았니 한쪽 신발 벗어 하늘 높이 던지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들었니 인플레가 민들레처럼 피던 시절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소리 우우우, 어디에도 닿지 않는 길 갑자기 넓어지고 우우,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기억하니 오른손에 맞은 오른뺨이 왼뺨을 그리워하고 머뭇대던 왼손이 오른뺨을 서러워하던 시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소리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그리워하니 우리 함께 술에 밥을 말아먹어도 취하지 않던 시절을 시(詩)와 詩魂 2022.06.16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이성복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이성복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목 좁은 꽃병에 간신히 끼여 들어온 꽃대궁이 바닥의 퀘퀘한 냄새 속에 시들어가고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있다 시(詩)와 詩魂 2022.06.16
금기/이성복 금기 이성복 아직 저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제 마음 속에는 많은 금기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될 일도 우선 안 된다고 합니다 혹시 당신은 저의 금기가 아니신지요 당신은 저에게 금기를 주시고 홀로 자유로우신가요 휘어진 느티나무 가지가 저의 집 지붕 위에 드리우듯이 저로부터 당신은 떠나지 않습니다 시(詩)와 詩魂 2022.06.16
극지에서/이성복 극지에서 이성복 무언가 안 될 때가 있다 끝없는, 끝도 없는 얼어붙은 호수를 절룩거리며 가는 흰, 흰 북극곰 새끼 그저, 녀석이 뜯어먹는 한두 잎 푸른 잎새기 보고싶을 때가 있다 소리라도 질러서, 목쉰 소리라도 질러 나를, 나만이라도 깨우고 싶을 때가 있다 얼어붙은 호수의 빙판을 내리찍을 거뭇거뭇한 돌덩어리 하나 없고 그저, 저 웅크린 흰 북극곰 새끼라도 쫓을 마른 나무 작대기 하나 없고 얼어붙은 발가락 마디마디가 툭, 툭 부러지는 가도가도 끝없는 빙판 위로 아까 지나쳤던 흰, 흰 북극곰 새끼가 또다시 저만치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내 몸은, 발걸음은 점점 더 눈에 묻혀 가고 무언가 안되고 있다 무언가, 무언가 안 되고 있다 시(詩)와 詩魂 2022.06.16
그 여름의 끝/이성복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시(詩)와 詩魂 2022.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