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지에서
이성복
무언가 안 될 때가 있다
끝없는, 끝도 없는 얼어붙은 호수를
절룩거리며 가는 흰, 흰 북극곰 새끼
그저, 녀석이 뜯어먹는 한두 잎
푸른 잎새기 보고싶을 때가 있다
소리라도 질러서, 목쉰 소리라도 질러
나를, 나만이라도 깨우고 싶을 때가 있다
얼어붙은 호수의 빙판을 내리찍을
거뭇거뭇한 돌덩어리 하나 없고
그저, 저 웅크린 흰 북극곰 새끼라도 쫓을
마른 나무 작대기 하나 없고
얼어붙은 발가락 마디마디가 툭, 툭 부러지는
가도가도 끝없는 빙판 위로
아까 지나쳤던 흰, 흰 북극곰 새끼가
또다시 저만치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내 몸은, 발걸음은 점점 더 눈에 묻혀 가고
무언가 안되고 있다
무언가, 무언가 안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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