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처음의 들판 / 이제니

처음의 들판 / 이제니 ​ 발 달린 것들의 질주가 어제의 들판을 가득 메운다 이상하고 빠르게 이상하고 기쁘게 오늘의 검은 무늬를 한없이 길게 밀고 나가며 나를 달리게 하는 것은 들판이 아니라 들판에 대한 상상 들판은 들판 너머에 있었다 언제나 거의 언제나 처음처럼 들판 너머 들판 들판 너머 들판 한 발자국 앞의 한 발자국이 흐려질 때 뒤이어 내디딘 또다른 한 발자국이 묻는다 죽은 친구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나의 없는 꼬리는 어느 하늘을 향해 날고 있을까 어제의 나를 잊고 새사람이 된다는 건 무슨 뜻일까 풍경은 뒤로 밀려나기 위해 끝없이 펼쳐진다 사라지기 위해 죽어가기 위해 다시 태어나기 위해 지평선 너머 진혼곡 너머 우편마차 너머 구름다리 너머 기억을 더듬는다는 것은 앞으로 간다는 말일까 뒤로 간다는 ..

시(詩)와 詩魂 2023.06.11

갈색의 책/이제니

갈색의 책/이제니 ​ 나 혹은 너는 나무숲에서 오래된 책 한 권을 발굴했다 나무숲은 꼭 갈색일 필요는 없다 아주 희미한 갈색의 암시 정도만 먼지와 빛의 깊이를 지닌 고고학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해두자 누군가 경건한 얼굴로 문장을 읽어내려갔다 행간과 행간은 지독히도 넓었고 침묵 또한 꼭 그만큼 벌어졌다 정말 가슴 아프게도 들리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소리 내서 말할 리 없잖아 꿈에서 깼을 땐 단 하나의 단어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 흔들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기억하는 얼룩과 네가 기억하는 얼룩 흰 것 위에 검은 것, 검은 것 위에 흰 것 벌레 먹은 나뭇잎 구멍 사이로 오후 네시의 햇빛이 스러지듯이 보도블록 깨진 틈 사이로 모래알들이 쓸려들어가듯이 누구든 좋으니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아는 사람이..

시(詩)와 詩魂 2023.06.11

분실된 기록/이제니

분실된 기록/이제니 ​ 첫 문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슬픔을 드러낼 수 있는, 슬픔을 어루만질 수 있는. 고통의 고통 중의 잠든 눈꺼풀 속에서. 꿈속에서 나는 한 권의 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펼치자마자 접히는 책 접힌 부분이 전체의 전체의 전체인 책 너는 붉었던 시절이 있었다 너는 검었던 시절이 있었다 검었던 시절 다음엔 희고 불투명한 시절이 희고 불투명한 시절 다음에는 거칠고 각진 시절이 우리는 이미 지나왔던 길을 나란히 걸었고. 열린 눈꺼풀 틈으로 오래전 보았던 한 세계를 바라보았다. 고양이와 나무와 하늘 속의 고양이 나무와 하늘과 고양이 속의 하늘과 산책하기 좋은 날씨였다. 잎들은 눈부시게 흔들리고 아무것도 아닌 채로 희미하게 매달려 있었다.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인가. 나는 지금 순간의 안쪽에 있는..

시(詩)와 詩魂 2023.06.11

비산의 바람/이제니

비산의 바람/이제니 ​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이 꿈에 나타나 웃었다 울었다 사라졌다. 바람 사이로 사라지는 사람. 사람 뒤로 사라지는 바람. 비산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한쪽은 울고 한쪽은 웃는다. 울면서 웃는 것. 웃으면서 우는 것. 말하면서 말하지 않는 것.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것. 여럿이서 하나가 되는 것보다 하나인 채 여럿인 방식을 택한 이후로. 그 골짜기에서 너는 돌이 되었구나. 바람이 되었구나. 내내 고독해졌구나. 아코디언과 폴카. 룰렛과 도미노. 광장으로 모여드는 겁 없는 청춘들처럼. 이름 붙이지 않아도 이미 있었던 사물의 의연함으로. 아름다움 속에서. 아름다움 속에서. 너는 높낮이가 다른 물그릇을 두드린다. 들리지 않는 마음처럼 어떤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종이 위에 적..

시(詩)와 詩魂 2023.06.11

빗나가고 빗나가는 빛나는 삶/이제니

빗나가고 빗나가는 빛나는 삶/이제니 ​ 기차는 얼음의 나라로 간다고 했다. 하얀 눈 위의 하얀 나무 속을 건너간다고 했다. ​ 왜 그곳에 가려했을까. 왜 그것을 보려 했을까. ​ 너의 얼음도 구름도 바람도 물도 없는 곳에 도착한다. 너의 작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세계는 천장 한 퀴퉁이로 모여드는 세 개의 직선에 지나지 않았다. 너는 하나의 꼭짓점에 모인 세 개의 직선을 늘릴 수 있는 데까지 늘리고 늘린다. 직선은 점점 곡선으로 휘어진다. 휘어진 곡선이 너를 향해 모여든다. 무수한 사람이 네 속에서 들끓고 있다. 무수한 목소리가 네 목소리 위로 내려앉는다. 무수한 길들이 너를 지나간다. ​ 한 발 걸어가면 한 발 멀어지는 들판이라고 했다. 기차는 하연 눈 위의 하얀 나무 속을 건너가고 있다. ​..

시(詩)와 詩魂 2023.06.11

또 하나의 노래가 모래밭으로 떠난다/이제니

또 하나의 노래가 모래밭으로 떠난다/이제니 ​ 또 하나의 노래가 모래밭으로 떠난다. 모든 것들은 어제의 세계를 바라본다. 불필요한 말을 건네고 불안을 품는다. 감추어져 있는 것들이 움직이고 있다.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나아간다. 어제와 오늘은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먼저 떠나간 말들이 떠오른다. 바람과 우연에 몸을 맡긴다. 자리 잡은 모든 것이 잃어버린 자리를 대변하고 있다. 죽은 사람은 끝없이 끝없이 목소리를 이어간다. 녹아내리는 태양 아래 자취를 감추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머물지 못하는 몸짓과 잔존하는 빛이 뒤섞여 있다. 거짓말을 통해 가로질러 가면 어제의 노래가 내일의 흔적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노래가 모래밭으로 떠난다.

시(詩)와 詩魂 2023.06.11

언젠가 가게 될 해변/이제니

언젠가 가게 될 해변/이제니 ​ 해변은 자음과 모음으로 가득 차 있다. 모래알과 모래알 속에는 시간이 가득하다. 시간과 시간 사이로 모래알이 스며든다. 미약한 마음이 미약한 걸음으로. 미약한 걸음이 다시 미약한 마음으로. 너는 너를 잃어가고 있다. 너는 너를 잃어가면서 비밀을 걷고 있다. 노을은 점점 옅어지고 있다. 슬픔은 점점 진해지고 있다. 언젠가 가게 될 해변. 우리가 줍게 될 조약돌과 조약돌이 호주머니 속에 가득하다. 흰 돌 하나 검은 돌 하나. 다시 흰 돌 하나 검은 돌 하나. 휩쓸리고 휩쓸려갈 조약돌의 박자로. 잊어버리고 잊어버리게 될 목소리의 여운으로. 흰 돌 하나 검은 돌 하나. 다시 흰 돌 하나 검은 돌 하나. 미래의 빛은 미래의 빛으로 남겨져 있다. 언젠가 언제고 가게 될 해변. 별이 ..

시(詩)와 詩魂 2023.06.11

발 없는 새/이제니

발 없는 새/이제니 ​ 청춘은 다 고아지. 새벽이슬을 맞고 허공에 얼굴을 묻을 때 바람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지. 어디든 어디든 무엇이든 무엇이든, 청춘은 다 고아지. 도착하지 않은 바람처럼 떠돌아다니지. 나는 발 없는 새. 불꽃 같은 삶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 옷깃에서 떨어진 단추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 난 사라진 단추 구멍 같은 너를 생각하지. 작은 구멍으로만 들락날락거리는 바람처럼 네게로 갔다가 내게로 돌아오지. 우리는 한없이 둥글고 한없이 부풀고 걸칫하면 울음을 터뜨리려고 해. 질감 없이 부피 없이 자꾸만 날아오르려고 하지. 구체성이 결여된 삶에도 사각의 모퉁이는 허용될까. 나는 기대어 쉴 만한 곳이 필요해 각진 곳이 필요해. 널브러진 채로 몸을 접을 만한 작은 공간이 필요해 나무로 만든 작은 ..

시(詩)와 詩魂 2023.06.11

열매도 아닌 슬픔도 아닌/이제니

열매도 아닌 슬픔도 아닌/이제니 ​ ​ ​ 여름은 무덥고 열매는 둥글다 ​ 작고 둥근 열매의 눈 코 입을 사물의 표면 위로 가져온다 ​ ​사물의 질감은 사물의 주인의 것으로 속했던 자리가 사라진 만큼 사물의 색채도 희미해진다 ​ 시간 속에서 시간과 함께 시간을 누리는 사람들 속에서 ​ 언제부턴가 모든 사람의 얼굴에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람의 얼굴이 덧씌워져 있어서 ​ 너는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녹색 줄기가 무섭고 너 자신이 너 자신인 것은 더욱 무섭고 ​ 너의 병은 짙어져가고 그것은 병에 담겨 있다 ​ 그것에서는 박하 향이 나고 그러나 그것은 박하가 아니고 한글로 다만 페퍼민트라고 적혀 있다 ​ 박하는 낱말에 앞서 향으로 먼저 자신을 드러내고 너는 낱말에 속았고 낱말은 오래된 믿음에 흔들렸고 출렁거리..

시(詩)와 詩魂 2023.06.11

너는 오래도록 길고 어두웠다/이제니

너는 오래도록 길고 어두웠다 ​ ​ ​ 나는 오래도록 길고 어두웠다. 너는 오래도록 무겁고 아득했다. 너는 너를 참았고, 나는 나를 속였고, 너는 너를 피했고. 나는 나를 멀리했다. 네가 돌보던 사람들이 마침내 모두 죽었을 때 너는 너 자신을 죽였고. 그리하여 몸이 지나간 자리 위로 길고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갔다. 오래전 죽은 개 한마리도 너와 함께 걸어갔다. 깊고 맑은 눈동자와 작고 네모난 방 하나면 족합니다. 고립되지 않기 위해서 너는 매일매일 꾸준히 무언가를 썼다. 문장은 담장 밖을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길고 어두운 길이라고 쓰면 길고 어두운 길이 펼쳐졌다. 길고 어두운 길을 따라 길고 어두운 밤을 지나 길고 어두운 마음에 도착하면 너의 낯빛을 맑게 물들이는 오랜 단념이 있었다. 창문을 조금만 열..

시(詩)와 詩魂 2023.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