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너는 오래도록 길고 어두웠다/이제니

나뭇잎숨결 2023. 6. 11. 11:46

너는 오래도록 길고 어두웠다 

나는 오래도록 길고 어두웠다. 너는 오래도록 무겁고 아득했다. 너는 너를 참았고, 나는 나를 속였고, 너는 너를 피했고. 나는 나를 멀리했다. 네가 돌보던 사람들이 마침내 모두 죽었을 때 너는 너 자신을 죽였고. 그리하여 몸이 지나간 자리 위로 길고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갔다. 오래전 죽은 개 한마리도 너와 함께 걸어갔다. 깊고 맑은 눈동자와 작고 네모난 방 하나면 족합니다. 고립되지 않기 위해서 너는 매일매일 꾸준히 무언가를 썼다. 문장은 담장 밖을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길고 어두운 길이라고 쓰면 길고 어두운 길이 펼쳐졌다. 길고 어두운 길을 따라 길고 어두운 밤을 지나 길고 어두운 마음에 도착하면 너의 낯빛을 맑게 물들이는 오랜 단념이 있었다. 창문을 조금만 열어줄 수 있습니까. 불빛을 조금만 낮춰줄 수 있습니까. 주어 없는 문장 문장마다 너의 그림자가 배어 있었다.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프게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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