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열매도 아닌 슬픔도 아닌/이제니

나뭇잎숨결 2023. 6. 11. 11:48

열매도 아닌 슬픔도 아닌/이제니

여름은 무덥고 열매는 둥글다

작고 둥근 열매의 눈 코 입을 사물의 표면 위로 가져온다

​사물의 질감은 사물의 주인의 것으로

속했던 자리가 사라진 만큼 사물의 색채도 희미해진다

시간 속에서 시간과 함께 시간을 누리는 사람들 속에서

언제부턴가 모든 사람의 얼굴에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람의 얼굴이 덧씌워져 있어서

너는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녹색 줄기가 무섭고

너 자신이 너 자신인 것은 더욱 무섭고

너의 병은 짙어져가고 그것은 병에 담겨 있다

그것에서는 박하 향이 나고

그러나 그것은 박하가 아니고

한글로 다만 페퍼민트라고 적혀 있다

박하는 낱말에 앞서 향으로 먼저 자신을 드러내고

너는 낱말에 속았고 낱말은 오래된 믿음에 흔들렸고

출렁거리면서 너는 열어볼 수 없다는 듯이 잠겨 있다

열릴 수 없는 것이

물과 바람과 흙과 함께 열매로 맺히듯이

당신은 나를 낳았고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사라진 자리마다 가득히 찾아왔으므로

나는 엎드려서 쓰고 또 썼다

열매는 수직으로 움직인다고

바닥으로 떨어져서야 자유를 누리는 것이 있다고

한 걸음 뒤의 일조차도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열매의 향과 색을 누리면서

반복되는 밤마다 매번 다른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도

나는 다시 또 당신의 무릎 앞에 도착해 있었다

한여름에 땀 흘리는 물컵

하얗게 질려서 땀 흘리는 물컵

울리는 흘리는 하얗게 질려서

한여름에 물컵 하얗게 울리는

흘리는 물컵 하얗게 한여름에

바라보는 물컵마다 하얗게 울리고 있어서

문장은 이상한 동시에 오랜 슬픔을 상키시켰고

무한히 뻗어 나가는 줄기에서 떨어져 나와

계절을 다한 열매 하나가 내 손에 쥐어져 있다

그것은 엄마가 제일 좋아했던 여름 과일

엄마는 내 손 안에 작은 열매로 쥐어져 있다

열매로 완성된 것은 좀처럼 울지 않고

너는 열어보지 못했던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

여린 내부는 알 수 없는 물질로 가득 차 있어

껍질의 안쪽은 점점 더 가볍게 부풀어 오른다

물질이 본성 그대로의 포물선을 그려나가듯이

열매는 다시 온전히 저 혼자 하늘로 올라간다

열매의 구체성과는 무관하게

오래 맺어왔던 이름과도 무관하게

그러니 나도 가고 있다

뒤늦게 누리면서 사랑을 울면서

여름 열매가 향하는 곳을 따라

하얗게 울리는 흘리는 또 하나의 열매로서

 

'시(詩)와 詩魂'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젠가 가게 될 해변/이제니  (0) 2023.06.11
발 없는 새/이제니  (0) 2023.06.11
너는 오래도록 길고 어두웠다/이제니  (0) 2023.06.11
바다/이성복  (0) 2022.06.16
음악/이성복  (0) 2022.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