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저항의 멜랑콜리
― 프렌치 얼 그레이 백작에게
박정대
오늘은 날이 흐려 저녁이 너무 일찍 찾아 왔다
낡은 녹색의자에 기대어 앉아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듣는다
창가의 산국화 바람에 흔들리는 저녁
말안장 위에 작은 등불을 밝히고 오랜 동무가 써 보낸 글을 읽노라면 조금씩
어두워지다 다시 화안하게 밝아지는 저녁
그대는 잘 있는지
난 하루에 밥은 한끼
산책하고 글 쓰고 가끔 책을 읽기도 해
요즘은 해 질 녘도 좋고 동 틀 무렵도 좋더라
밤새 꼼지락거리다 맞이하는 아침의 햇살과 바람, 그런 게 밤과 낮을 이루는
소립자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게 삶과 시의 본질적 성분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물리적 고립이 형성하는 공간, 감정의 고독을 유지하기 위한 시간의 사용, 그
런 걸 나는 저항의 멜랑콜리라 부른다
공간이 만들어낸 무한의 고독이라 부른다
이런 생각들과 더불어 오는 아침의 맑은 공기와 풍경들이 나는 좋다
아침이 오면 숲 속으로 펼쳐진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돋아나는 풀잎과 작은 돌멩이의 행성들
이런 걸 나는 아름다운 감정의 무한, 저항의 멜랑콜리라 부르고 싶어지는 거다
그럴 때면 저 멀리 두고 온 세상을 향해 이렇게 한 마디하고 싶어지는 거다
그러니, 세계여 닥쳐!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가 보내준 프렌치 얼 그레이 차를 한동안 뜯어보지
도 않은 채 선반에 놓아두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볍게 먼지처럼 흩어지며 겨우 존재하는 세계여
한 마리의 추억이 구름처럼 이동하고 다시 허공에 봉인되는 백년 동안의 고독 속에서
옛 사랑 같은 건 옛날에나 있었고 옛날은 아직, 여전히, 오지 않은 날들이었나니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끝내 옛 사랑으로 남으리라
선반에서 얼 그레이 차를 꺼내보는 저녁이다
찻잔 속에서 맑은 눈동자 하나 돋아나 얼 그레이 얼 그레이, 초저녁 별빛처럼
어른거리며 번지는데
늦은 저녁 속으로는 하염없이 비가 내려 세상의 모든 음악은 비에 젖고 있다
저녁연기처럼 피어올라 컹컹컹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흩어지는 순한 짐승의 울음소리여
세상의 모든 음악은 끝나고 세상의 모든 삶이 다시 시작되는 이 시각에도
누군가는 밤새 등불 곁에 앉아 책을 읽고
누군가는 밤새 리스본의 타호 강변을 서성거리고
누군가는 밤새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고요히 삶을 횡단하느니
뜨거웠다 식어가는 한 잔의 프렌치 얼 그레이 차를 마시며 아직 오지 않은 추억
이 하염없이 창밖의 생을 바라보는 저녁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삶을 꿈꾸던 자가 처음으로, 처음으로 바라보는 낯선 저녁이다
세상의 모든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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