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 박정대

나뭇잎숨결 2023. 9. 24. 08:56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 박정대

 

 

바보 같은 로맹 가리, 영혼의 발전소를 짓겠다니!

차라리 나는 별을 노래하겠어, 깊은 어둠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새

 

 

그러나 가령 톱밥난로의 첫 페이지, 스웨터의 두 번째 영혼 그리고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같은 거

 

그래서 나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들으며 글을 쓰네, 담배를 피우네, 담배를 피우면 자꾸만 그대 생각이 나 시커먼 커피를 마시네

 

나는 빈곤과 허탈의 대지에서 왔네

 

심장의 내륙에서 혹한의 영혼까지 바람을 거슬러 오르는 횡단의 어려움, 집시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 나는 무모한 패관, 나는 생의 백지위임장을 들고 몽상과 연민이 끝난 저 먼 대지로부터 왔네

 

생은 마치 처절한 화학반응과도 같아서 실패한 실험처럼 황폐하게 돋아난 낡은 시간의 깃발이 여기에 있네

 

나는 이제 깃발의 무모함, 무모함의 천막을 여기에 다시 펼치려 하네

 

끝이 보이지 않는 백지의 평원 그 끝으로 누군가 말을 타고 아득히 사라져가네, 희미하게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들

 

무가당 담배 클럽 총서의 목록

 

 

 

그러나 가령 톱밥난로의 첫 페이지, 스웨터의 두 번째 영혼 그리고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같은 거

 

그래서 나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들으며 글을 쓰네, 담배를 피우네, 담배를 피우면 자꾸만 그대 생각이 나 시커먼 커피를 마시네

 

촛불을 켜면 돋아나는 눈에 덮인 한 장의 백야, 눈에 덮인 백야에 창문을 달아주면 문득 풀잎처럼 흔들리는 한 권의 몽상의 대지

 

폭설의 지구

열병의 대륙

 

사계절의 내면으로 폭설이 내릴 때 열병에 휩싸인 고독은 기타 쇄빙선을 타고 얼음장 같이 차가운 음악을 연주하네, 음악이 부서지는 지구 카페

 

카페 지구에서는 담배를 마음대로 피울 수 있어야 하네

 

그건 주점 지구에서도 마찬가지

 

간혹 어떤 행성들은 담배 연기의 동력으로 움직이기도 하네

 

그대가 고요히 담배를 말고 있을 때, 레코드판은 회전하고 지구는 자전하고 또 다른 행성은 불꽃처럼 타오를 준비를 하네

 

그대는 물질로 이루어진 섬세한 시간, 물질적 황홀로 가득한 대륙, 하마터면 나는 그대를 온몸으로 횡단할 뻔했네

 

그러나 그대는 끝내 화학적으로 떠나갔네

 

햇살이 환하게 비치는 1월의 창가에서 나는 알았네

 

그대가 남겨두고 간 햇살의 분량과 그대가 짐 꾸려 떠난 산소들의 분량을, 그리하여 내가 숨 쉬는 대기의 화학적 산소 요구량이 미세하게 변동되었음을

 

그대가 떠나가고 끝내 내 기억 속엔 그대에 대한 희미한 화학적 반응의 추억들만이 남겨졌네

 

나는 이제 이별의 회한 같은 건 노래하지 않으려네

 

다만 화학적 사랑이 끝났으므로 당분간 나에게는 그 어떤 화학적 반응도 없으리란 거, 다시는 화학 실험 같은 사랑 따위는 하지 않으리란 거

 

그런 직감적 사실만이 몇 개의 먼지처럼 내 눈 앞에 떠도네

 

그러나 그 한없이 가벼운 먼지의 유령들조차 바람이 불면 휘익 사라질 테니, 창밖에 매어둔 슬픈 귀의 당나귀를 풀어 타고 지금은 누군가 타박타박 홀로 먼 길 떠나는 시간

 

어두워지는 1월의 창가에 앉아 나는 이제 다만 화학적 추억에 잠기네

 

 

 

그러나 가령 톱밥난로의 첫 페이지, 스웨터의 두 번째 영혼 그리고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같은 거

 

그래서 나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들으며 글을 쓰네, 담배를 피우네, 담배를 피우면 자꾸만 그대 생각이 나 시커먼 커피를 마시네

 

삶이라는 극지

 

그대라는 대륙

 

목표도 없이, 계획도 없이 그대를 여행하는 것이 이번 생을 횡단하는 나의 본질적 계획이었네

 

그러나 그대는 얼마나 거대한 환상과 고독의 대륙인가

 

환상과 고독의 화학적 근원은 물질, 영혼의 무게는 가끔 물질들의 열량으로 드러나기도 하네

 

 

 

그러나 가령 톱밥난로의 첫 페이지, 스웨터의 두 번째 영혼 그리고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같은 거

 

그래서 나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들으며 글을 쓰네, 담배를 피우네, 담배를 피우면 자꾸만 그대 생각이 나 시커먼 커피를 마시네

 

별들은 깊은 어둠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새

 

그대가 떠나갈수록 나는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한 마리의 별

 

그래서 한 잔의 마유주를 마시고 호롱불을 켜면 탁자 위로 찾아오는 단 하나의 저녁, 그런 저녁의 불빛 아래로 추억과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방목될 때, 두 잔의 마유주는 혁명, 세 잔의 마유주는 망명, 넉 잔의 마유주는 차마 말할 수 없음

 

그러나 빗방울들이 말하길, 추억은 달리는 말 위에서 바라본 산들의 열병, 그 풍경에 감염된 시선의 열병

 

열병의 시선이 꿈꾸는 오래된 단 하나의 강렬한 욕망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가 그 이름에 닿고 싶은 열망

 

처마처럼, 골목처럼 떠오르는 오 핀란드, 콘래드, 콘래드, 오오 블라디미르

 

그리고 장 위그 앙글라드여, 나는 코펜하겐에서부터 점점 말을 잃었네, 심장의 페치카는 활활 타오르는데 해독할 수 없는 짧은 단어들만이 혀끝에서 맴돌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말을 잃었던 거야

 

그러니까 / 글쎄 / 아무튼 / 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혼숙, 좌충우들과 기억상실의 시

 

 

그러나 가령 톱밥난로의 첫 페이지, 스웨터의 두 번째 영혼 그리고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같은 거

 

국경수비대의 3월이 가면 네 장의 담요를 덮은 집시의 다섯 손가락 사이로 담배 연기가 피어올라 여섯 개의 천막을 칠 거야

 

이탈리아의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들어온 일곱 마리의 늑대가 여덟 개의 달 아래를 지나 아홉 개의 심장을 묻으러 어디론가 달려갈 거야

 

그런데 도대체 기타리스트 10번 국도는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나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들으며 글을 쓰네, 담배를 피우네, 담배를 피우면 자꾸만 그대 생각이 나 시커먼 커피를 마시네

 

여행자 증명서가 필요한 도플갱어적인 삶, 갱신, 갱신

 

피아노 야간열차 스타인웨이 174호, 폐기

 

오페라 정거장, 갱신

 

새벽, 폐기

 

안개, 폐기

 

침대, 폐기

 

지중해, 유효

 

바람, 폐기

 

교토역 앞의 건널목, 갱신

 

교토에서의 장어 낚시, 폐기

 

은각사, 폐기

 

요원들, 갱신

 

유럽 극장, 폐기

 

런던 극장, 폐기

 

밀밭, 폐기

 

구름, 폐기

 

라벤더, 폐기

 

대평원, 폐기

 

남쪽 항구, 폐기

 

깃발, 폐기

 

별, 폐기

 

지하철, 폐기

 

파리, 갱신

 

중국 식당, 폐기

 

커피포트, 폐기

 

뮌헨, 폐기

 

비, 폐기

 

프라하, 갱신

 

부다페스트, 갱신

 

모나스티라키, 신타그마, 오모니아, 라리사, 그리스 지하철 안내 방송을 하던 여자의 목소리는 레베티카 가수의 노래 같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저녁이 올 때 나는 이곳에 앉아 다른 곳으로 오는 저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네, 갱신

 

천사 금성무

 

 

그러나 가령 톱밥난로의 첫 페이지, 스웨터의 두 번째 영혼 그리고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같은 거

 

그래서 나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들으며 글을 쓰네, 담배를 피우네, 담배를 피우면 자꾸만 그대 생각이 나 시커먼 커피를 마시네

 

커피는 쓰네, 밤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의 연료등

 

그대가 아코디언으로 나를 연주하는 밤이면 나도 아주 멀리로 날아가는 꿈을 꾸네

 

 

그러나 가령 톱밥난로의 첫 페이지, 스웨터의 두 번째 영혼 그리고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같은 거

 

밤은 참 고요하기도 하군

 

이미 그대 생의 심장을 횡단한 열차는 그대 늑골 너머로 사라지고 진눈깨비 하염없이 흩날리고 있으니

 

누군가 고요히 담배를 말아 피우는 밤, 여기는 환하던 생의 거리를 다 지나와 당도한 진눈깨비 내리는 밤

 

그대 입술 위에 하냥 얹혀 있고 싶었던 나는 그대가 후, 하고 한숨을 쉬면 날아가버릴 담배 연기 같은 거였으니

 

그렇게 날아가 멀리, 아주 멀리 그대 밤하늘의 한 모퉁이에서 한없이 침묵할 별빛이었으니

 

진눈깨비, 진눈깨비, 진눈깨비

 

이렇게 하염없이 진눈깨비 쏟아지는 밤이면 나뭇잎들의 입술도 어둠에 젖어 담배 연기만이 사르르 사르르 생의 문턱을 넘나드는 밤

 

나는 그대가 말아 피우던 담배를 위한 한 잎의 백야 같은 거였으니

 

끊임없이 눈이 내리는 이 밤은 한없이 고요하기도 하군

 

그래서 나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들으며 글을 쓰네, 담배를 피우네, 담배를 피우면 자꾸만 그대 생각이 나 시커먼 커피를 마시네

 

커피는 쓰네

 

나도 내가 쓴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네, 그러나 이번 생은 내가 쓰려던 시가 아니었네

 

나는 오로지 찬란한 그대 기억의 불꽃만으로 단 한 편의 시를 쓰길 원했으나 유령들의 입김 같은 생이여

 

그래서 나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들으며 글을 쓰네, 담배를 피우네, 담배를 피우면 자꾸만 그대 생각이 나 시커먼 커피를 마시네

 

 

 

그러나 가령 톱밥난로의 첫 페이지, 스웨터의 두 번째 영혼 그리고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같은 거

 

백지의 천사, 천사의 죽음

 

영혼의 발전소를 짓겠다니, 바보 같은 로맹 가리!

 

소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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