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별을 굽다/김혜순

별을 굽다/김혜순 사당역 4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려고 에스컬레이터에 실려 올라가서 뒤돌아보다 마주친 저 수많은 얼굴들 모두 붉은 흙 가면 같다 얼마나 많은 불가마들이 저 얼굴들을 구워냈을까 무표정한 저 얼굴 속 어디에 아침마다 두 눈을 번쩍 뜨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밖에서는 기척도 들리지 않을 이 깊은 땅속을 밀물져 가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하늘 한구석 별자리마다 쪼그리고 앉아 별들을 가마에서 구워내는 분 계시겠지만 그분이 점지하는 운명의 별빛 지상에 내리겠지만 물이 쏟아진 듯 몰려가는 땅속은 너무나 깊어 그 별빛 여기까지 닿기나 할는지 수많은 저 사람들 몸속마다에는 밖에선 볼 수 없는 뜨거움이 일렁거리나 보다 저마다 진흙으로 돌아가려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불가마 하나씩 깃들어 있나보다 저렇듯..

시(詩)와 詩魂 2021.10.27

종(鐘) 속에서/김혜순

종(鐘) 속에서/김혜순 잡히기 전에 이슬 맺힌 옷을 말려보겠다 잡히기 전에 에스컬레이터를 한정없이 오르내리고 잡히기 전에 나는 바다바라보기 전문가 파도를 소란스러운 팔처럼 뻗어보겠다 다정한 미소를 저 산 너머까지 펼쳐보겠다 나뭇잎 그림자가 얼굴을 간질이는 기분을 좋아해 보고 모르는 한 사람을 미행해보고 (어디로 가려고 했을까, 나는 머리도 한 올 없는데 내 별명은 민대머리, 무모증, 복어대가리, 학교종이 땡땡땡인데) 뇌 속의 추적자인가 철공소의 이명인가 거칠게 내쉬는 내 숨을 줄에 묶어 잡아챘다가 다시 놓아주는 너는 나는 지금 주름을 닫은 허파 나는 지금 주름을 닫은 아코디언 그렇지만 다정하게 미소짓고 있겠다 (그래, 가발이 휙 벗겨지고 두개골이 내던져진다 온 도시에 내 두개골이 내던져진다 내 두개골이 ..

시(詩)와 詩魂 2021.10.27

물들어 간다는 것은/조동례

물들어 간다는 것은 - 조동례 물들어간다는 것은/마음 열어 주변과 섞인다는 뜻이다/섞인다는 것은/저마다의 색을 풀어 닮아간다는 것이니/찬바람이 불 때마다/밀었다 당겼다 밀었다 당겼다/닫힌 마음이 열릴 때까지/서로의 체온을 맞춰가는 것이다/태양이 어둠을 받아들이는 것도/봄꽃이 사람들을 밖으로 불러내는 것도/마음이 닮아가는 것이고/마음이 닮았다는 것은 편하다는 것이고/편하다는 것은/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간다는 것이다/네가 아프면 곧 내가 아프다는 것이다.

시(詩)와 詩魂 2021.10.27

거울/ 이성복

거울 -이성복 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나는당신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죽음속에 우리는 허리까지 잠겨 있습니다/나도 당신도 두렵기만 합니다/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이 길이 아니라면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이 길이 아니라면 길은 어디에/당신이 나의 길을 숨기고 있습니까/내가 당신의 길을 가로막았습니까/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가득차 있습니다/거울처럼

시(詩)와 詩魂 2021.10.27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이성복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 - 이성복, 시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중. ​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에도 체력이 필요하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에는 엄청난 체력 소모가 동반되며 ‘미워하는 마음’ 자체는 ‘미워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그 마음’과 다투는 일이 같이 진행된다. 또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은 ‘그 누군가를 미워하는 자신의 미운 마음’과 계속 대치 중이어야 한다. 이러한 복잡한 사정에서 탄생하는 것이 바로 ‘형용 모순’이다. 죽도록 다시 보기는 싫은데 또 죽도록 다시 보고 싶은 이상한 일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벌어진다. 꼴도 보기 싫은데 제발 한 번만 봤으면 하는 모순들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괴로워한다. ​ “잘 있지 말아요”, 라는 말과 “그립다”라는 말은 사실 결이 전혀 다..

시(詩)와 詩魂 2021.10.27

숨길 수 없는 노래 3/이성복

숨길 수 없는 노래 3 - 이성복 내 지금 그대를 떠남은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길이 끝난 자리에 서 있는 두 개의 고인돌 같은 것을 그리고 그 사이엔 아무도 발 디딜 수 없는 고요한 사막이 있습니다 나의 일생은 두개의 다른 죽음 사이에 말이음표처럼 놓여 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오랜 저녁빛에 눈먼 두개의 고인돌 같은 것을 내 지금 그대를 떠남은 내게로 오는 그대의 먼 길을 찾아서입니다

시(詩)와 詩魂 2021.10.27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이성복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이 성복 물로 된 돌이 있는가? 금으로 된 물이 있는가? ㅡ 파블로 네루다,「遊星」 불끄고 자리에 누우면 달은 머리맡에 있다. 깊은 밤 하늘 호수에는 물이 없고, 엎드려 자다가 고개 든 아이처럼 달의 이마엔 물결무늬 자국. 노를 저을 수 없는 달은 수심 없는 호수를 미끄러져 가고, 불러 세울 수 없는 달의 배를 탈 것도 아닌데 나는 잠들기가 무섭다. 유난히 달 밝은 밤이면 내 딸은 나보고 달보기라 한다. 내 이름이 성복이니까, 별 성 자 별보기라고 고쳐 부르기도 한다. 그럼 나는 그애 보고 메뚜기라 한다. 기름한 얼굴에 뿔테 안경을 걸치면, 영락없이 아파트 12층에 날아든 눈 큰 메뚜기다. 그러면 호호부인은 호호호 입을 가리고 웃는다. 벼랑의 붉은 꽃 꺾어 달라던 水路夫人보..

시(詩)와 詩魂 2021.10.27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이성복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 이성복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강이 하늘로 흐를 때, 명절 떡살에 햇살이 부서질 때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흐르는 안개가 아마포처럼 몸에 감길 때, 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 다리보다 아름다울 때, 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 묶일 수밖에 없다

시(詩)와 詩魂 2021.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