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종(鐘) 속에서/김혜순

나뭇잎숨결 2021. 10. 27. 09:18

종(鐘) 속에서/김혜순

 

 

잡히기 전에 이슬 맺힌 옷을 말려보겠다

 

잡히기 전에 에스컬레이터를 한정없이 오르내리고

잡히기 전에 나는 바다바라보기 전문가

 

파도를 소란스러운 팔처럼 뻗어보겠다

 

다정한 미소를 저 산 너머까지 펼쳐보겠다

 

나뭇잎 그림자가 얼굴을 간질이는 기분을 좋아해 보고

 

모르는 한 사람을 미행해보고

 

(어디로 가려고 했을까, 나는

머리도 한 올 없는데

내 별명은 민대머리, 무모증, 복어대가리, 학교종이 땡땡땡인데)

 

뇌 속의 추적자인가

철공소의 이명인가

 

거칠게 내쉬는 내 숨을 줄에 묶어

잡아챘다가 다시 놓아주는 너는

 

나는 지금 주름을 닫은 허파

나는 지금 주름을 닫은 아코디언

 

그렇지만 다정하게 미소짓고 있겠다

 

(그래, 가발이 휙 벗겨지고 두개골이 내던져진다

온 도시에 내 두개골이 내던져진다

내 두개골이 최루탄을 피해 달아나는 발자국 같이 흩어진다)

 

잡히기 전에 흘러가다 돌부리를 잠시 붙잡아보는 강물

 

잡히기 전에 가구점의 침대에라도 눕고 싶어 머뭇거리는 발길

 

잡히기 전에 옥상에서 뛰어내리다 7층에 켜놓은 촛불을 응시하는 눈동자

 

그래, 네가 줄을 잡아당기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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