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가을 강(江)/김명인

가을 강(江) -김명인 살아서 마주보는 일조차 부끄러워도 이 시절 저 불 같은 여름을 걷어 서늘한 사랑으로 가을 강물되어 소리 죽여 흐르기로 하자 지나온 곳 아직도 천둥치는 벌판 속 서서 우는 꽃 달빛 난장(亂杖) 산굽이 돌아 저기 저 벼랑 폭포지며 부서지는 우뢰 소리 들린다 없는 사람 죽어서 불 밝힌 형형한 하늘 아래로 흘러가면 그 별빛에도 오래 젖게 되나니 살아서 마주잡는 손 떨려도 이 가을 끊을 수 없는 강물 하나로 흐르기로 하자 더욱 모진 날 온다 해도

시(詩)와 詩魂 2021.09.28

따뜻한 적막/김명인

따뜻한 적막 -김명인 아직은 제 풍경을 거둘 때 아니라는 듯 들판에서 산 쪽을 보면 그쪽 기슭이 환한 저녁의 깊숙한 바깥이 되어 있다 어딘가 활활 불 피운 단풍 숲 있어 그 불 곁으로 새들 자꾸만 날아가는가 늦가을이라면 어느새 꺼져버린 불씨도 있으니 그 먼 데까지 지쳐서 언 발 적신들 녹이지 못하는 울음소리 오래오래 오한에 떨리라 새 날갯짓으로 시절을 분간하는 것은 앞서 걸어간 해와 뒤미처 당도하는 달이 지척 간에 얼룩 지우는 파문이 가을의 심금임을 비로소 깨닫는 일 하여 바삐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같은 하늘에서 함께 부스럭대는 해와 달을 밤과 죽음의 근심 밖으로 잠깐 튕겨두어도 좋겠다 조금 일찍 당도한 오늘 저녁의 서리가 남은 온기를 다 덮지 못한다면 구들장 한 뼘 넓이만큼 마음을 덥혀놓고 눈물 글썽거리..

시(詩)와 詩魂 2021.09.28

숨길 수 없는 노래 / 이성복

숨길 수 없는 노래 1 -이성복 어두운 물 속에서 밝은 불 속에서 서러움은 내 얼굴을 알아보았네 아무에게도 드릴 수 없는 꽃을 안고 그림자 밟히며 먼 길을 갈 때 어김없이 서러움은 알아보았네 감출 수 없는 얼굴 숨길 수 없는 비밀 서러움이 저를 알아보았을 때부터 나의 비밀은 빛이 되었네 빛나는 웃음이었네 하지만 나는 서러움의 얼굴을 알지 못하네 그것은 서러움의 비밀이기에 서러움은 제 얼굴을 지워버렸네 숨길 수 없는 노래 2 -이성복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 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봄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을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 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

시(詩)와 詩魂 2021.09.18

어떻게 꽃은 잎과 섞여/이성복

어떻게 꽃은 잎과 섞여 -이성복 어떻게 꽃은 잎과 섞여 잎을 핏물 들게 하는가 마라, 생각해 보라 비린내나는 네 살과 단내 나는 네 숨결 속에서 내숭 떠는 초록의 눈길을 어떻게 받아내야 할지 초록 잎새들이 배반하는 황톳길에서 생각해 보라, 마라, 어떻게 네 붉은 댕기가 처음 나타났는지 그냥 침 한번 삼키듯이, 헛기침 한번 하듯이 네겐 쉬운 일이었던가 마라, 내게 어렵지 않은 시절은 없었다 배반 아닌 사랑은 없었다 솟구치는 것은 토하는 것이었다 마라, 나를 사랑하지 마라

시(詩)와 詩魂 2021.09.18

바다 / 이성복​

바다 / 이성복 ​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나는 아무 대답도 안 했어요 ​ 서러움이 날 따라왔어요 나는 달아나지 않고 그렇게 우리는 먼 길을 갔어요 ​ 눈앞을 가린 소나무숲가에서 서러움이 숨고 한 순간 더 참고 나아가다 불현듯 나는 보았습니다 ​ 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 흰 물거품 입에 물고 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내게 손 흔들었습니다

시(詩)와 詩魂 2021.09.18

앞날 /이성복

앞날 -이성복 당신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늘 불안합니다 나로 인해 당신 앞날이 어두워지는 까닭입니다 내 곁에서 당신이 멀어져 가면 나의 앞날은 어두워집니다 나는 당신을 잡을 수도 놓을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떠나갈까 안절부절입니다 한껏 내가 힘들어하면 당신은 또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은 팔도 다리도 없으니 내가 당신을 붙잡지요 나는 당신이 떠나야 할 줄 알면서도 보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시(詩)와 詩魂 2021.09.18

편지/이성복

편지 - 이성복 -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 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 …… 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기억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 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

시(詩)와 詩魂 2021.09.18

강 / 이성복

강 / 이성복 남들은 저를 보고 쓸쓸하다 합니다 해거름이 깔리는 저녁 미루나무숲을 따라갔기 때문이지요 남들은 저를 보고 병들었다 합니다 매연에 찌들려 저의 얼굴이 검게 탔기 때문이지요 저는 쓸쓸한 적도 병든 적도 없습니다 서둘러 그들의 도시를 지나왔을 뿐입니다 제게로 오는 것들을 막지 않으며 제게서 가는 것들을 막지 않으며 그들의 눈 속에 흐르는 눈물입니다

시(詩)와 詩魂 2021.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