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이영주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 이영주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너의 몸을 안지 않고서는 차갑고 투명한 살을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쓸어보지 않고서는 1년 동안 너는 바닷속에서 물처럼 흘러가고 있다 너는 심연 속에서 살처럼 흩어지고 있다 발이 없어서 우는 사람 오래전부터 바다는 잠을 자고 있어서 죽음을 깨우지 못한대 너는 묘지도 없이 잠속에서 이를 갈며 떨고 있다 너는 죽음을 시작할 수가 없다 산 자들은 항상 죽은 자 주위로 모여든다고 하는데 우리는 슬픔도 없이 모여 있다 진정한 애도는 몸이 없이 시작되지 않는다 모든 비밀은 바닷속에 잠겨 있다 바다에서 죽지 않는 손이 올라온다 그 손을 잡아끌어 올려야 한다

시(詩)와 詩魂 2021.09.11

피아노가 된 나무 2 -이영주 시인에게 / 김경주

피아노가 된 나무 2 -이영주 시인에게 / 김경주 엄지 아모레스 페로스, 너의 아름다운 짝짝이 슬리퍼를 신고 내 방에서 몰래 피아노를 친다 방문을 몰래 열고 들어와 네 극지에 핀 파충류를 보러 왔다 마라 오늘은 녹색 건반들의 반짝임, 내일은 음의 첨벙에서 아물자 나의 건반 속엔 정교한 물고기들이 둥둥 떠다닌다 눈을 뒤집고 검지 건반을 누르면 검은 대륙이 흰 대륙으로 흘러오고 너의 흰 대륙이 나의 검은 대륙으로 넘친다 오늘은 이론을 주장하기보다는 유리가 된 손가락을 펴보는 일 남자는 페달을 밟고 있고 여자는 그 남자의 발등 위에 두 발을 올려 놓는다 중지 동굴을 발견하고 포크레인으로 떠서 배에 싣고 오는 학자가 있었다 선실에서 피아노를 치며 그는 흐뭇해한다 저 동굴 속엔 가장 영리하게 적응해온 녹조류들이 ..

시(詩)와 詩魂 2021.09.11

남겨진 것 이후에/이제니

남겨진 것 이후에 -이제니 ​ 흰 집 건너 흰 집이 있어 살아가는 냄새를 희미하게 풍기고 있다. 거룩한 말은 이 종이에 어울리지 않아서 나 자신도 읽기 못하도록 흘려서 쓴다. 하늘은 어둡고. 바닥은 무겁고. 나는 다시는 오지 않는 사람을 가지게 되었고. 너는 말할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읽히지 않는 문장이 되었다. 낮잠에서 깨어나 문득 울음을 터뜨리는 유년의 얼굴로. 마음과 물질 사이에서 서성이는 눈빛으로. 인간 저 너머의 음역으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 돌보는 말과 돌아보는 말 사이에서 밀리는 마음과 밀어내는 마음 사이에서 ​ 사랑받은 적 없는 사람이 모르는 사이 하나하나 감정을 잃어버리듯이. 한밤의 고양이와 친해진 것은 어느 결에 사람을 저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사람이라는 말. 그저 사랑이라는..

시(詩)와 詩魂 2021.09.11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이제니

발화 연습 문장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 이제니 혼자이기 위해 집으로 가듯 너는 쓴다. 종이 위에서 쓴다. 흘려서 쓴다. 자신에게조차 발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팔분음표에 하나씩. 한 걸음에 하나씩. 천천히 일정한 박자로. 끊어지듯 이어지며. 이어지듯 끊어지며. 어떤 기계음처럼. 단속적으로. 소리 아닌 소리로 발음되기를 바라면서. 발화자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다. 문이라는 듯이. 그리움이라는 듯이. 열고 열리는 마음이라는 듯이. 마음은 통과한다. 기억은 건너뛴다. 너는 너라고 썼다가 지운다. 너는 나라고 썼다가 지운다. 인칭은 끝없이 나아간다. 일인칭에서 이인칭으로. 이인칭에서 삼인칭으로. 삼인칭에서 다시 일인칭으로. 너는 여러 겹을 가진 인칭 속으로 숨는다. 여러 겹의 목소리는 여러 겹으로 드러..

시(詩)와 詩魂 2021.09.11

구름에서 영원까지/이제니

구름에서 영원까지 - 이제니 고양이는 구름을 훔쳤다. 슬픔이 그들을 가깝게 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너의 이름뿐이다. 한때의 기억이 구름으로 흘러갔다. 흔들리는 노래 속에서 말없이 걸었다. 침묵은 발자국소리로 다가왔다. 돌의 심장에 귀를 기울였다.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의 저편에서 날아오는 것, 시간의 저편으로 달아나는 것. 멀리서 오는 것은 슬픔이다. 어둠은 빛을 발하며 들판으로 모여 들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영원에 가까워진다고 믿었다. 한때의 구름이 기억으로 흩어졌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은 검은 조약돌.나는 네게 주었던 것은 하얀 모래알. 바다는 오늘도 그 자리에 없었다. 물결이 너를 데려갔다. 어둠이 너를 몰고..

시(詩)와 詩魂 2021.09.11

울고 있는 사람/이제니

울고 있는 사람 -이제니 우울을 꽃다발처럼 엮어 걸어가는 사람을 보았다. 땅만 보고 걷는 사람입니다. 왜 그늘로 그늘로만 다니느냐고 묻지 않았다. 꽃이 가득한 정원 한편에서 울고 있는 사람. 누군가의 성마른 말이 너를 아프게 하는구나. 누군가의 섣부른 생각이 너를 슬프게 하는구나. 갇혔다고 닫혔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곧장 일어나 밖으로 밖으로 나가세요, 산으로 들으로. 강으로 바다로. 너를 품어주는 것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세요. 그렇게 걷고 걷고 걷다 다시 본래의 깊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세요. 그러나 너는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남아 있구나. 갈 곳이 없어 갈 곳이 없는 사람인 채로. 구석진 곳을 찾아 혼자서 울고 있구나. 구석진 곳에서 울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의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구나.

시(詩)와 詩魂 2021.09.11

너는 멈춘다/이제니

너는 멈춘다 이제니 너는 멈춘다. 횡단보도 앞에서. 철 지난 시계탑 앞에서. 사라져가는 계절의 마음 앞에서. 너는 멈춘다. 수정할 수도 있었던 틀린 맞춤법과 건너 뛸 수도 있었던 띄어쓰기와 다시 되돌아오는 긴 한숨 앞에서. 너는 멈춘다. 지나간 복도는 침울하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어둠을 가리키고 있고. 선택지 없는 방향성만을 제시하고 있고. 계절은 바뀐다. 계절이 바뀌듯 지나간 마음도 바뀐다. 지나간 마음을 바꾸면 조금은 더 살아갈 수 있습니다. 너는 멈춘다. 지나간 여름의 이파리들 앞에서. 쓸모를 찾아가는 사물들 곁에서. 탁자는 비어 있다. 저녁 해가 기울어가며 만들어내는 그림자 그림자들. 오래 전에 들었던 가슴 아픈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쓸모없음을 상기시키는 어두운 도형 하나가 문득 제 그림..

시(詩)와 詩魂 2021.09.11

물의 결가부좌/이문재

물의 결가부좌 - 이문재 거기 연못 있느냐 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 개의 달이 빠져나와도 끄떡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도 있느냐 오늘도 거기 있어서 연의 씨앗을 연꽃이게 하고, 밤새 능수버들 늘어지게 하고, 올 여름에도 말간 소년 하나 끌어들일 참이냐 거기 오늘도 연못이 있어서 구름은 높은 만큼 깊이 비치고, 바람은 부는 만큼만 잔물결 일으키고, 넘치는 만큼만 흘러 넘치는, 고요하고 깊고 오래된 물의 결가부좌가 오늘 같은 열엿샛날 신새벽에도 눈뜨고 있느냐 눈뜨고 있어서, 보름달이 우는 이 신새벽 누가 소리 없이 뗏목을 밀지 않느냐, 뗏목에 엎드려 연꽃 사이로 나아가지 않느냐, 연못의 중심으로 스며들지 않느냐, 수천 수만의 연꽃들이 몸 여는 소리 들으려, 제 온몸을 넓은 귀로..

시(詩)와 詩魂 2021.08.31

한계령을 위한 연가/문정희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었으면. ​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상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

시(詩)와 詩魂 2021.08.31

태양의 각문(刻文) /김남조

태양의 각문(刻文) - 김남조 가을을 감고 우리 산(山)속에 있었습니다. 하늘이 기(旗)폭처럼 펄럭이고 눈 들 때마다 태양은 익은 석류처럼 파열했습니다. 당신은 낙엽을 깔고 향수를 처음 안 소년처럼 구름을 모아 동자(瞳子)에 띄웠으며 나는 한아름 벅찬 바다를 품은 듯이 당신과 가을을 느끼기에 한때 죄를 잊었습니다. 마치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벗었음을 알던 옛날 에덴의 경이(驚異)같은 것이 분수처럼 가슴에 뿜어 오르고 만산 피 같은 홍엽 만산 불 같은 홍엽 아니, 아니 만산 그리움 같은 그리움 같은 홍엽에서 모든 사랑의 전설들이 검붉은 포도주로 뚝뚝 떨어졌습니다. 청량한 과즙(果汁)처럼 바람이 불어오고 바람이 스쳐갈 뿐 사변 광막한 하루의 천지가 다만 가을과 당신만으로 가득차고 나는 차라리 열병 앓는 소녀..

시(詩)와 詩魂 2021.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