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입김/박용하

입김 / 박용하 말할 수 없는 것들 말 안 해도 되는 것들 말하나 마나 한 것들 말하고 나면 후회할 것들 말 안 하면 우습게 보는 것들 기어코 말해야 하는 것들 굳이 말 안 해도 되는 것들 말만 많은 것들 한 말 또 하고 또 하는 것들 그 말이 그 말인 것들 말 들으나 마나 한 것들 말만 잘하는 것들 닳고 닳은 것들 말없이는 안 되는 것들 말로는 안 되는 것들 할 말 안 할 말 막하는 것들 말없이도 되는 것들 아예 말없는 것들 말이면서 노래인 것들 여벌이 없는 것들 이번 생만 있는 것들 수평선만 있는 것들 까진 무르팍만 있는 것들 심장인 것들 번개인 것들 말없는 손들 말없는 발들 말없는 입김들 숨들 목숨들

시(詩)와 詩魂 2021.08.25

슬픔의 힘/권경인

슬픔의 힘 / 권경인 남은 부분은 생략이다 저 물가, 상사화 숨막히게 져내려도 한번 건넌 물엔 다시 발을 담그지 않으리라 널 만나면 너를 잃고 그를 찾으면 이미 그는 없으니 십일월에 떠난 자 십일월에 돌아오지 못하리라 번뇌는 때로 황홀하여서 아주 가끔 꿈속에서 너를 만난다 상처로 온통 제 몸 가리고 서 있어도 속이 아픈 사람들의 따뜻한 웃음 오래 그리웠다 산을 오르면서 누구는 영원을 보고 누구는 순간을 보지만 애써 기다리지 않아도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사람이 평생을 쏟아부어도 이루지 못한 평화를 온몸으로 말하는 나무와 풀꽃같이 그리운 것이 많아도 병들지 않은 무욕의 정신이여 그때 너는 말하리라 고통이라 이름한 지상의 모든 일들은 해골 속 먼지보다 가볍고 속세의 안식보다 더한 통속 없으니 뼈아픈 사..

시(詩)와 詩魂 2021.08.25

석류/안도현

석류 / 안도현 마당가에 석류나무 한 그루를 심고 나서 나도 지구 위에다 나무 한 그루를 심었노라, 나는 좋아서 입을 다물 줄 몰랐지요 그때부터 내 몸은 근지럽기 시작했는데요, 나한테 보라는 듯이 석류나무도 제 몸을 마구 긁는 것이었어요 새 잎을 피워 올리면서도 참지 못하고 몸을 긁는 통에 결국 주홍빛 진물까지 흐르더군요 그래요, 석류꽃이 피어났던 거죠 나는 새털구름의 마룻장을 뜯어다가 여름내 마당에 평상을 깔고 눈알이 붉게 물들도록 실컷 꽃을 바라보았지요 나는 정말 좋아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가을이 찾아 왔어요 나한테 보라는 듯이 입을 딱, 벌리고 말이에요 가을도, 도대체 참을 수 없다는 거였어요

시(詩)와 詩魂 2021.08.25

수선화에게/정호승

수선화에게 -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시(詩)와 詩魂 2021.08.25

스미다/이병률

스미다 이병률 새벽이 되어 지도를 들추다가 울진이라는 지명에 울컥하여 차를 몬다 울진에 도착하니 밥냄새와 나란히 해가 뜨고 나무가 울창하여 울진이 됐다는 어부의 말에 참 이름도 잘 지었구나 싶어 또 울컥 해변 식당에서 아침밥을 시켜 먹으며 찌개냄비에서 생선뼈를 건져내다 또다시 왈칵 눈물이 치솟는 것은 무슨 설움 때문일까 탕이 매워서 그래요? 식당 주인이 묻지만 눈가에 휴지를 대고 후룩후룩 국물을 떠먹다 대답 대신 소주 한 병을 시킨 건 다 설움이 매워서다 바닷가 여관에서 몇 시간을 자고 얼굴에 내려앉는 붉은 기운에 창을 여니 해 지는 여관 뒤편 누군가 끌어다 놓은 배 위에 올라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한 사내 해바라기 숲을 등지고 서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사내 내 설움은 저만도 못해서 내 눈..

시(詩)와 詩魂 2021.08.25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손택수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 손택수 연탄이 떨어진 방, 원고지 붉은 빈칸 속에 긴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들 듯 이불 돌돌 아랫도리에 손을 데우며, 창문 너머 금 간 하늘 아래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전학 온 여자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보, 고, 싶, 다, 보, 고, 싶, 다 눈이 내리던 날들 벽돌 붉은 벽에 등을 기대고 싶었다 불의 뿌리에 닿고 싶은 하루하루 햇빛이 묻어 놓고 간 온기라도 여직 남아 있다는 듯 눈사람이 되어, 눈사람이 되어 만질 수 있는 희망이란 벽돌 속에 꿈을 수혈(輸血)하는 일 만져도 녹지 않는, 꺼지지 않는 불을 새벽이 오도록 빈 벽돌 속에 시(詩)를 점화하며, 수신자 불명의 편지만 켜켜이 쌓여가던 세월, 그 아이는 떠나고 벽돌집도 이내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가슴속 노을 ..

시(詩)와 詩魂 2021.07.02

두고 온 것들/황지우

두고 온 것들/황지우 반갑게 악수하고 마주앉은 자의 이름이 안 떠올라 건성으로 아는 체하며, 미안할까봐, 대충대충 화답하는 동안 나는 기실 그 빈말들한테 미안해, 창문을 좀 열어두려고 일어난다. 신이문역으로 전철이 들어오고, 그도 눈치챘으리라, 또다시 핸드폰이 울리고, 그가 돌아간 뒤 방금 들은 식당이름도 돌아서면 까먹는데 나에게서 지워진 사람들, 주소도 안 떠오르는 거리들, 약속 장소와 날짜들,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 지켰어야만 했던 것들과 갚아야 할 것들; 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세상에다가 그냥 두고 왔을꼬! 좀더 곁에 있어줬어야 할 사람, 이별을 깨끗하게 못해준 사람, 아니라고 하지만 뭔가 기대를 했을 사람을 그냥 두고 온 거기, 訃告도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제주 風蘭 한점 배달시키랴?

시(詩)와 詩魂 2021.07.02

손이 손을 찾는다/이문재

손이 손을 찾는다 - 이문재 손이 하는 일은 다른 손을 찾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에서 지고 내가 나인 것이 시끄러워 견딜 수 없을 때 내가 네가 아닌 것이 견딜 수 없이 시끄러울 때 그리하여 탈진하여 온종일 누워 있을 때 보라 여기가 삶의 끝인 것 같을 때 내가 나를 떠날 것 같을 때 손을 보라 왼손은 늘 오른손을 찾고 두손은 다른 손을 찾고 있었다 손은 늘 따로 혼자 있었다 빈손이 가장 무거웠다 겨우 몸을 일으켜 생수 한 모금 마시며 알았다 모든 진정한 고마움에는 독약 같은 미량의 미안함이 묻어 있다 고맙다는 말은 따로 혼자 있지 못한다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엊저녁 너는 고마움이었고 오늘 아침 나는 미안함 이었다 손이 하는 일은 결국 다른 손을 찾는 것이다 오른손이 왼손을 찾아 가슴 앞에서 가지..

시(詩)와 詩魂 2021.06.18

사랑이 나가다/이문재

사랑이 나가다 이문재 손가락이 떨리고 있다 손을 잡았다 놓친 손 빈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사랑이 나간 것이다 조금 전까지 어제였는데 내일로 넘어가버렸다 사랑을 놓친 손은 갑자기 잡을 것이 없어졌다 하나의 손잡이가 사라지자 방 안 모든 손잡이들이 아득해졌다 캄캄한 새벽이 하얘졌다 눈이 하지 못한 입이 내놓지 못한 말 마음이 다가가지 못한 말들 다 하지 못해 손은 떨고 있다 예감보다 더 빨랐던 손이 사랑을 잃고 떨리고 있다 사랑은 손으로 왔다 손으로 손을 찾았던 사람 손으로 손을 기다렸던 사람 손은 손부터 부여잡았다 사랑은 눈이 아니다 가슴이 아니다 사랑은 손이다 손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손을 놓치면 오늘을 붙잡지 못한다 나를 붙잡지 못한다

시(詩)와 詩魂 2021.06.18

모래시계 /이문재

모래시계 -이문재 이쯤에서 쓰러지자 이쯤에서 쓰러져서 조금 남겨두기로 하자 당분간 이렇게 쓰러져 있기로 하자 누군가 나를 일으켜 세워 멈춰 있던 자신의 시간을 살릴 수 있도록 자기 시간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누군가의 아픔이 기쁜 아픔이 될 수 있도록 누군가의 기쁨이 아픈 기쁨이 될 수 있도록 아니다 상체를 완전히 비우고 우두커니 서 있도록 하자 누군가 나를 뒤집어 자신의 새로운 시간과 만날 수 있도록 이렇게 하체의 힘으로 끝끝내 서 있도록 하자 숨을 죽이고 가느다란 허리의 힘으로 꼿꼿이 서서 기다리기로 하자 누군가 나를 뒤집어 누군가의 맨 처음이 시작되도록 누군가의 설레는 맨 앞이 되도록

시(詩)와 詩魂 2021.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