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한잎의 여자/ 오규원

한잎의 여자/ 오규원 한잎의 여자 1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듯 보일 듯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가진 여자 눈물같은 여자 슬픔같은 여자 병신같은 여자 시집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한잎의 여자 2 나는 사랑했네. 난장에서 삼천원 주고 바지를 사 입는 여자, 남대문 시장에서 자주 스웨터를 사는 여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원에 사는 여자..

시(詩)와 詩魂 2021.04.15

지울 수 없는 얼굴/고정희

지울 수 없는 얼굴 -고정희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시(詩)와 詩魂 2021.04.14

백치애인/신달자

백치애인 -신달자 나에겐 백치 애인이 있다 그 바보의 됨됨이가 얼마나 나를 슬프게 하는지 모른다 내가 얼마나 저를 사랑하는 지를 그리워 하는 지를 그는 모른다 별 볼일 없이 우연히 정말이지 우연히 저를 만나게 될까 봐서 길거리의 한 모퉁이를 지켜서 있는 지를 그는 모른다 제 단골 다방에서 다방문이 열릴 때마다 불길 같은 애수의 눈을 쏟고 있는 지를 그는 모른다 길거리에서 백화점에서 또는 버스 속에서 시장에서 행여 어떤 곳에도 네가 나타 날 수 있으리 라는 착각에 긴장된 얼굴을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이 안타까움을 그는 모른다 밤이면 밤마다 네게 줄 편지를 쓰고 또 쓰면서 결코 부치지 못하는 이 어리석음을 그는 모른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적어도 내게 있어선 그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장님이며 내 목소..

시(詩)와 詩魂 2021.04.14

칼과 칼/김혜순

칼과 칼 -김혜순 칼이 칼을 사랑한다 발이 없는 것처럼 공중에서 사랑한다 사랑에 빠진 칼은 칼이 아니다 자석이다 서로를 끌어당기며 맴도는 저 집요한 눈빛! 흩어지는 땀방울 내뱉는 신음 두개의 칼이 잠시 공중에 엇갈려 눕는가 했더니 번쩍이는 두 눈빛으로 저 멀리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도 한다 서로 몸을 내리치며 은밀하게 숨긴 곳을 겨냥하는 순간, 그 눈빛 속에서 4월마다 벚꽃 모가지 다 베어지기를 그 몇 번! 누군가 하나 바닥에 몸을 내려놓아야 끝이 나는 칼의 사랑 분홍신을 신은 무희처럼 쉬지 않고 사랑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랑을 멈출 수는 없는 시퍼런 몸 힘껏 껴안고 버틸 수는 있어도 끝내 헤어져 돌아갈 수는 없는 공중에서 내려올 수도 그렇다고 넘어질 수도 없는 꼿꼿한 네 개의 무릎에서 피가 솟는다 저 몸..

시(詩)와 詩魂 2021.04.14

천 장도 더 썼겠지 만 장도 더 썼겠지 /정진규

러브레터 - 정진규 여기서도 다 뵌다 살갗으로 보인다 편지 한 장 없이 편지 한 장도 없이 他國들판 헤매이는 네가 보인다 천 장도 더 썼겠지 만 장도 더 썼겠지 이제는 흐르지도 않을 너의 눈물, 너의 눈물로 네 가슴 속 빨래코 있을 네가 보인다 여기서도 다 뵌다 쥐어짜 널어 말릴 햇볕이나 있더냐 햇볕 한줌 있더냐 여기는 네 나라 땅 두터운 햇볕, 네 떠난 뒤 그 뒤에도 변함이 없는 햇볕, 모아서 낙찰없이 모두 모아서 장농 속 켜켜이 개켜 두었다 내가 개켜 두었다 보아라, 보거라 네 비우고 간 뜨락, 뜨락에도 지금 저리 햇볕이 지천이다 이곳은 지천이다 내 그리움이 지천이다 편지 한 장 없이 편지 한 장도 없이 他國들판 헤매이는 너를 지울 수 없다 눈에 밟힌다 그러다간 승냥이가 될라 한마리 이리가 될라 달빛..

시(詩)와 詩魂 2021.04.14

풀잎/박성룡

풀잎 - 박성룡 1. 너의 이름이부드러워서 너를 불러 일으키는나의 성대가 부드러워서 어디에 비겨볼의미도 없이 그냥 바람 속에피어 서 있는 너의 그 푸른 눈길이부드러워서 너에게서 피어오른푸우런 향기가 너에게서 일어나는드높은 음향이 발길에 어깨 위에언덕길에 바위 틈에 그냥 저렇게 피어 서 있는너의 양자(樣姿)가 부드러워서 아 너의 온갖지상의 어지러운 사상(事象)에 관한 싱싱한 추리가부드러워서..... 2. 꽃보다밝은 이름 물방울 보다맑은 이름 흙보다가까운 이름 칼끝보다날카로운 이름 풀잎이여,아 너 홀로 어디에고 살아 있는 이름이여.

시(詩)와 詩魂 2021.04.14

석남꽃-/서정주

석남꽃 -서정주 머리에 석남(石南)꽃을 꽂고 네가 죽으면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나도 죽어서 나 죽는 바람에 네가 놀래 깨어나면 너 깨는 서슬에 나도 깨어나서 한 서른 해만 더 살아 볼꺼나 죽어서도 살아서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서른 해만 더 한번 살아 볼꺼나 내 글 써놓은 공책을 뒤적거려 보니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라 제목한 이 시(詩)는 1969년 7월 15일 새벽 한시에 쓴 것으로 되어 있으니, 이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관악산 밑으로 이사오기 바로 한 해 전 일인데, 그 때의 공덕동 집에도 나무와 풀섶이 꽤나 짙어 모기가 많아서 그 때문에 짧은 여름밤을, 열어 놓은 창 사이로 날아드는 모기 떼와 싸움깨나 하고 앉았다가 쓴것인 듯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은 내 육체의 꼴이지, 마음만은 그래도 지금이..

시(詩)와 詩魂 2021.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