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칼
-김혜순
칼이 칼을 사랑한다
발이 없는 것처럼 공중에서 사랑한다
사랑에 빠진 칼은 칼이 아니다 자석이다
서로를 끌어당기며 맴도는 저 집요한 눈빛!
흩어지는 땀방울 내뱉는 신음
두개의 칼이 잠시 공중에 엇갈려 눕는가 했더니 번쩍이는 두 눈빛으로 저 멀리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도 한다
서로 몸을 내리치며 은밀하게 숨긴 곳을 겨냥하는 순간, 그 눈빛 속에서 4월마다 벚꽃 모가지 다 베어지기를 그 몇 번!
누군가 하나 바닥에 몸을 내려놓아야 끝이 나는 칼의 사랑
분홍신을 신은 무희처럼 쉬지 않고 사랑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랑을 멈출 수는 없는
시퍼런 몸 힘껏 껴안고 버틸 수는 있어도 끝내 헤어져 돌아갈 수는 없는
공중에서 내려올 수도 그렇다고 넘어질 수도 없는
꼿꼿한 네 개의 무릎에서 피가 솟는다
저 몸도 내 몸처럼 구멍이다 저 검은 구멍을 베어버려라 거기서 솟는 따뜻한 피로 얼굴을 씻어라
아무리 소리쳐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저 끔찍한 사랑
그러기에 이제 내 사랑은 몸을 공중에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고
한번도 발을 땅에 붙이지 못한 것이었다고 말해야 하나?
다행인가? 우리 사랑이 아직 저렇게 공중에 떠 있다는 거?
-『당신의 첫』(문학과지성사, 2008)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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