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석남꽃-/서정주

나뭇잎숨결 2021. 4. 14. 15:21

석남꽃

 

-서정주


머리에 석남(石南)꽃을 꽂고

네가 죽으면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나도 죽어서


나 죽는 바람에

네가 놀래 깨어나면

너 깨는 서슬에

나도 깨어나서



한 서른 해만 더 살아 볼꺼나

죽어서도 살아서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서른 해만 더 한번 살아 볼꺼나



내 글 써놓은 공책을 뒤적거려 보니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라 제목한 이 시(詩)는 1969년 7월 15일 새벽 한시에 쓴 것으로 되어 있으니, 이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관악산 밑으로 이사오기 바로 한 해 전 일인데, 그 때의 공덕동 집에도 나무와 풀섶이 꽤나 짙어 모기가 많아서 그 때문에 짧은 여름밤을, 열어 놓은 창 사이로 날아드는 모기 떼와 싸움깨나 하고 앉았다가 쓴것인 듯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은 내 육체의 꼴이지, 마음만은 그래도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한밤중쯤은 할 수 없이 그 영생(永生)이라는 걸 또 생각해야 견딜 마련이어서 물론 이런 걸 끄적거리고 버티고 있었을 것이다.

영생이란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마치 가을 으시시한 때에 흩옷만 겨우 한 벌 입은 푼수도 채 안 되는 내 영생의 자각과 감각 그것에 그래도 그 속팬츠 하나 몫은 너끈히 되게 나를 입힌 건저 《대동운옥(大同韻玉)》이란 책 속의 것으로 전해져 오는 신라(新羅) 때의 석남꽃이라는 꽃 얘기다. 그래 으시시해 오는 싸늘한 이 가을날에 이런 흩옷, 이런 속팬츠도 혹 아직 못입은 사람들도 있을까 하여 먼저 그 애기를 옮기기로 하니 싫지 않거든 잘 목욕하고 이거라도 하나 받아 입으시고 오싹한 신선(神仙)이라도 하나 되기 바란다.

신라 사람 최항(崔伉)의 자(字)는 석남(石南)인데, 애인이 있었지만 그의 부모가 금해서 만나지 못하다가 몇 달 만에 그만 덜컥 죽어 버렸다.

그런데 죽은 지 여드레 만의 한밤중에 항은 문득 그의 애인집에 나타나서, 그 여자는 그가 죽은 뒤인 줄도 모르고 좋아 어쩔 줄을 모르며 맞이해 들였다.

항은 그 머리에 석남꽃 가지를 꽂고 있었는데, 그걸 나누어서 그 여자한테 주며, "내 아버지 어머니가 너하고 같이 살아도 좋다고 해서 왔다."고 했다. 그래 둘이는 항의 집까지 가서, 항은 잠긴 대문을 보고 혼자 먼저 담장을 넘어 들어갔는데 밤이 새어 아침이 되어도 웬일인지 영 다시 나오질 않았다. 아침에 항의집 하인이 밖에 나왔다가 홀로 서 있는 여자를 보고 "왜 오셨소?"하고 물어, 여자가 항과 같이 왔던 이야기를 하니, 하인은, "그분 세상 떠난 건 벌써 여드레나 되었는데요. 오늘이 묻을 날입니다. 같이 오시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했다.

여자는 항이 나누어 주어 자기 머리에도 꽂고 있었던 석남꽃 가지를 가리키며, "그분도 이걸 머리에 틀림없이 꽂고 있을 것이다."고 했다.

그래, 그런가 안 그런가 어디 보자고 항의 집 식구들이 두루 알고 따지게 되어, 죽은 항이 담긴 널을 열고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아닌게아니라 항의 시체의 머리에는 석남꽃 가지가 꽂혀 있었고, 옷도 금시 밤 풀섶을 거쳐 온 듯 촉촉히 젖은 그대로였고, 벗겼던 신발도 다시 차려 신고 있었다.

여자는 항이 죽었던 걸 알고 울다가 너무 기가 막혀 금시 숨이 넘어가게 되었다.

그랬더니 그 기막혀 숨 넘어가려는 바람에 항은 깜짝 놀라 되 살아났다. 그래 또 서른 핸가를 같이 살아 늙다가 갔다.



이것이 《대동운옥》에 담긴 그 이야기의 전부를 내가 재주를 몽땅 다해 번역해 옮기는 것이니, 이걸 저 아돌프 히틀러의 비단 팬츠보담야 한결 더 좋은 걸로 간주해서 입건 안 입건 그건 이걸 읽는 쪽의 자유겠지만, 하여간 별 가진 것이 변변치 못한 내게는 이걸 읽은 뒤부턴 이게 몸에 찰싹 달라붙은 대견한 것이 되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 나는 이것을 읽은 뒤 10여 년 동안 이야기 속의 그 석남꽃을 찾아 헤매다가 겨우 올봄에야 경상도 영주(榮州)에서도 여러 날 걸어 들어가야 하는 태백산맥의 어떤 골짜기에서 나온 쬐그만 묘목 한 그루를 내 뜰에 옮기어 심고, 이것이 자라 내 키만큼 될 날을 기다리며 신선반(神仙班)의 영생의 마음속 연습을 계속하고 있다. 《대동운옥》이나 내 1969년 7월 어느 첫 새벽의 시에는 한 30년만 더 살기로 겸손하게 에누리해 놓았지만 사실은 아무래도 영원히 살아야만 원통치 않을 이 석남꽃 이야기의 싱그라운 사랑의 기운을…….

 

 

석남꽃의 일화(逸話)는 사람의 지극한 정성이 하늘도 감동시킨다는 한국인의 정서가 깃든 한떨기 꽃과 같은 이야기다. 그 일화의 석남꽃을 찾아 10여 년을 헤매고 다닌 지은이의 집요한 정성이 이 한 편의 수필을 낳고 있다.

인간은 흔히 이성과 감성을 지니고 났다. 이성은 합리성을 추구하고 감성은 정서에 의한 느낌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이성에 의해 학문이나 과학이 나타나고, 감성은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개 예술로 나타난다. 민담이나 전설에 의한 옛날 이야기는 감성의 작용에 의하여 구성된다. 거기에는 합리성이 전혀 없다. 비합리적으로 사건이 진행되며 현실을 넘어서 신령이나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것은 또 현실을 초월한 영적 세계나 기적의 세계로 이어진다. 석남꽃의 전설 역시 현실을 초월한 기적의 세계이다.

옛 이야기 속의 석남꽃을 찾아 10여 년 동안이나 헤매고 다녔다는 지은이의 끈질긴 집념은 결국 못다한 이승에서의 사랑을 완성시키려는 인간 본연 모습의 표현이어서 마음이 머문다.         - <석남꽃> 감상노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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