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더 먼저 더 오래/고정희

더 먼저 더 오래 ​ -고정희 더 먼저 기다리고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기다리는 고통 중에 사랑의 의미를 터득할 것이요 ​ 더 먼저 달려가고 더 나중까지 서 있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서 있는 아픔 중에 사랑의 길을 발견할 것이요 ​ 더 먼저 문을 두드리고 더 나중까지 문닫지 못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문닫지 못하는 슬픔 중에 사랑의 문을 열게 될 것요 ​ 더 먼저 그리워하고 더 나중까지 그리워 애통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리워 애통하는 눈물 중에 사랑의 삶을 차지할 것이요 ​ 더 먼저 외롭고 더 나중까지 외로움에 떠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외로움의 막막궁산 중에 사랑의 땅을 얻게 될 것이요 ​ 더 먼저 상처받고 더 나중까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

시(詩)와 詩魂 2021.03.25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정희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

시(詩)와 詩魂 2021.03.25

약탕관에 흐르는 눈물 /고정희

약탕관에 흐르는 눈물 -고정희 섬이라면 주야로 배 저어가고 산이라면 봉이마다 오르는 길 있으련만 사랑의 길눈 어두운 나는 그대에게 가는 길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천하 명금 이마지가 거문고줄을 타고 허오가 자지러지게 피리를 분들 노심초사 그대 생각뿐인 내 마음 즐겁지 않으니 영명한 한의사는 내게 사랑의 묘약 한 재 지어주며 사랑의 길눈 밝아지랍니다. 지은 정성 달이는 정성 마시는 정성으루다 사랑의 길눈 밝아져서 그대 나라에 잘들어가랍니다. 용한 한의사의 처방대로 햇빛 쨍쨍하고 선들바람 부는 날 받아 사랑의 묘약 달이기를 합니다. 진흙으로 빚은 약탕관에 천년설봉 얼음 녹여 사랑의 묘약 털어넣은 후 하루 스물네 시간에 돋은 기다림 썰어넣고 스무 날 우거진 오매불망 구엽초도 비벼넣고 석 달 열흘 무성한 그리..

시(詩)와 詩魂 2021.03.25

내 슬픔 저러하다 이름했습니다 /고정희

내 슬픔 저러하다 이름했습니다 - 편지11 -고정희 어제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끄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미움을 지워내고 희망을 지워내고 매일 밤 그의 문에 당도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러나 그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완강한 거부의 몸짓이거나 무심한 무덤가의 잡풀 같은 열쇠 구멍 사이로 나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그리고 그리다 돌아서면 그뿐, 문 안에는 그가 잠들어 있고 문 밖에는 내가 오래 서 있으므로 말없는 어둠이 걸어나와 싸리꽃 울타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어디선가 모든 길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처음으로 하늘에게 술 한잔 권했습니다 하늘이 내게도 술 한잔 권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때 하늘에서 술비가 내렸습니다 술비 술술 내려 술강 이루니 아뿔사, 내 슬픔 저리하다 ..

시(詩)와 詩魂 2021.03.25

어머니 나의 어머니/고정희

어머니 나의 어머니 -고정희 내가 내 자신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나직히 불러본다 어머니 짓무른 외로움 돌아누우며 새벽에 불러본다 어머니 더운 피 서늘하게 거르시는 어머니 달빛보다 무심한 어머니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릴 수 없을 때 북쪽 창문 열고 불러본다 어머니 동트는 아침마다 불러본다 어머니 아카시아 꽃잎 같은 어머니 이승의 마지막 깃발인 어머니 종말처럼 개벽처럼 손잡는 어머니 천지에 가득 달빛 흔들릴 때 황토 벌판 향해 불러본다 어머니 이 세계의 불행을 덮치시는 어머니 만고 만건곤 강물인 어머니 오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

시(詩)와 詩魂 2021.03.25

디아스포라 슬픔에게 /고정희

디아스포라 슬픔에게 -고정희 흐리고 어두운 날 남산에 우뚝 선 해방촌 교회당은 날벼락을 맞아 검게 울고 무더위로 가라앉은 내 몸 속에서는 그리운 신호처럼 전신주가 운다 끝간데 없는 곳으로부터 예감처럼 달려오는 그 소리는 한순간 고요히 물로 풀어지다가 불로 일어서다가 분노가 되다가 이내 다시 내 고향 해남의 상여 소리가 되어 저승으로 뻗은 전신주를 따라 나간다 우리의 침묵 깊은 곳에서 민들레 한 송이 서늘하게 흔들리는 오후, 민들레로 떠도는 사람들을 위하여 드디어 칼 쓴 예수가 갈짓자로 걸어 들어오고 있다. -----------------------------------------------------------高靜熙 詩集

시(詩)와 詩魂 2021.03.25

디아스포라 환상가에게 /고정희

디아스포라 환상가에게 -고정희 황제의 굳건한 안정을 믿으며 죽음의 집으로 돌아와 사방 넉 자짜리 자유의 벽지로 아방궁 같은 무덤을 도배했어 무덤은 언제나 밝고 아늑하네 황제가 내려 주신 모닥불에 둘러앉아 야구 경기와 권투 시합을 보며 입이 아프도록 승리를 신봉하고 머리맡에 예비된 숙면의 술잔으로 보다 깊이 잠드는 최면을 거네 황제는 꿈 속에서 빙그레 웃으시니 우리의 충정은 가이 눈물겹게 5호 활자 속에서 도 잠드시니 그제는 고향을 팔아 버렸고 어제는 의령을 잊어버렸고 오늘은 공약을 삼켜 버려야 하네 새 법이 오리라 믿어야 하네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또 하나의 튼튼하고 아름다운 무덤을 건축하며 밤을 낮이라 어둠을 빛이라 이름함으로써 믿게 되었네 오 우리들의 두 귀는 운다네 암호로 떠도는 이 시대..

시(詩)와 詩魂 2021.03.25

하늘에 쓰네 /고정희

하늘에 쓰네 -고정희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하늘에 쓰네 내 먼저 그대를 사랑함은 더 나중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보다 더 먼저 즐거움의 싹을 땄기 때문이리니 가슴속 천봉에 눈물 젖는 사람이여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이여 끝남이 없으니 시작도 없는 곳 시작이 없으니 멈춤 또한 없는곳, 수련꽃만 희게 희게 흔들리는 연못가에 오늘은 봉래산 학수레 날아와 하늘 난간에 적상포 걸어놓고 달나라 광한전 죽지사 열두 대의 비파에 실으니 천산의 매화향이 이와 같으랴 수묵색 그리움 만리를 적시도다 만리에 서린 사랑 오악을 감싸도다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동트는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

시(詩)와 詩魂 2021.03.25

강물에 빠진 달을 보러 가듯 /고정희

강물에 빠진 달을 보러 가듯 -고정희 강물에 빠진 달을 보러 가듯 새벽에 당신 사는 집으로 갑니다. 깨끗한 바람에 옷깃을 부풀리며 고개를 수그러뜨리고 말없이 걷는 동안 나는 생각합니다. 어제 부친 편지는 잘 도착되었을까 첫 줄에서 끝 줄까지 불편함은 없었을까 아직도 문은 열어두지 않았을까 아예 열쇠 수리공을 부를까 아니야, 그건 일종의 폭력이야 새벽에 어울리는 단정한 말들만이 내가 그에게 매달리는 희망인가? 신은 그 희망으로 목걸이를 약속하셨지 눈물로 혼을 씻는 자에게만 주시는 목걸이 아침이슬이 몸에 오싹하도록 걷고 또 걸어 나는 당신 집 앞에 발걸음을 멈춥니다. 골목은 고요하고 문은 굳게 닫겨 있습니다. 삼백여든아홉 번째 부자를 누르지만 아무 인기척도 들리지 않습니다. 품속에 간직한 초설 같은 편지 한..

시(詩)와 詩魂 2021.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