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상한 영혼을 위하여/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아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시(詩)와 詩魂 2021.03.25

보리수 나무 아래로 /김승희

보리수 나무 아래로 -김승희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나무 아래 길이 있을까, 난 그런 것을 잊어버렸어, 아니 차라리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정직하겠지, 잊어버린 사람은 잃어버린 사람 잃어버린 것을 쉽게 되찾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한밤중에 일어나 시간 속에 종종 성냥불을 그어보지, 내가 잃어버린 무슨 나무 아래 길이 혹여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 혹시 장미나무 아래로 가는 길이 물푸레 나무 아래 휘여진 히아신스 꽃길이 어디 어둠의 담 저 너머 흔적 같은 향기로 날 부르러 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난 청춘을 졸업한 게 아니라 청춘을 중퇴한 듯해. 청춘에서 휴학하고 있는 듯한 그래서 곧 청춘에 복학해야 할 듯한 그런 위태로운 아편길 위에서 난 정말 미친 듯이 뛰었지, 아, 그래, 정..

시(詩)와 詩魂 2021.01.02

하나를 위하여 /김승희

하나를 위하여 나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가 되고 싶을 뿐이다. 살았던 것들 중 그 중 아름다운 하나가, 슬펐던 것들 중 그 중 화사한 하나가, 괴로웠던 것들 중 그 중 순결한 하나가 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많은 길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길을 버리고 싶고 더 많은 꿈을 지우고 싶고 다만 하나의 길과 다만 하나의 꿈을 통하여 물방울이 물이 되고 불꽃들이 불이 되는 그 하나의 비밀을 알고 싶을 뿐이다. 하나를 이루기 위하여 그 하나에 닿기 위하여 나는, 하나 하나, 소등 연습을 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가로등이 다 꺼진 어둠 속으로 솜처럼 착하게 다 적셔져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타오르는 하나의 봉화가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시집 ; 달걀속의 生 / 문학사상사.

시(詩)와 詩魂 2021.01.02

견딤의 형식 /김승희

견딤의 형식 -김승희 모두 저기, 저, 강을 쳐다본다 산골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저기, 저, 산을 쳐다본다 평원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벌판의 끝, 저기, 저 지평선을 바라본다 강과 산과 지평선-그곳에서 언제나 무한이 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무한이 오는 곳을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한 번 태어나서 한번은 꼭 죽기 때문이다 한번만 사는 삶인데 한 번밖에 못사는 삶인데 여기, 이렇게, 아무래도 남루한 냄비 속이 너무 좁지 않는냐 하고 물음 대신, 울음 대신으로 저기, 저, 먼 곳을 끝없이 힘을 다해 훨, 훨, 바라보는 것이 아니냐? 비행기가 날아가는 저 하늘을, 구름이 흘러가는 저기 저곳을, 저기, 저, 방금 사라지는 휘트니 휴스턴의 노랫가락 사이를.

시(詩)와 詩魂 2021.01.02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김승희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김승희 아침에 눈뜨면 세계가 있다 아침에 눈뜨면 당연의 세계가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거기에 있다 당연의 세계는 왜, 거기에,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처럼, 왜, 맨날, 당연히, 거기에 있는 것일까, 당연의 세계는 거기에 너무도 당연히 있어서 그 두꺼운 껍질을 벗겨보지도 못하고 당연히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 당연의 세계는 누가 만들었을까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당연한 사람이 만들었겠지, 당연히 그것을 만들만한 사람, 그것을 만들어도 당연한 사람, 그러므로, 당연의 세계는 물론 옳다, 당연은 언제나 물론 옳기 때문에 당연의 세계의 껍질을 벗기려다가는 물론의 손에 맞고 쫓겨난다 당연한 손은 보이지 않은 손이면서 왜 그렇게 당연한 물론의 손일까, ..

시(詩)와 詩魂 2021.01.02

태양미사/김승희

태양미사 -김승희 어둠이 태양을 선행하니까 태양은 어둠을 살해한다. 현실이 꿈을 선행하니까 그리고 꿈은 현실을 살해한다. 구름의 벽 뒤에서 이제는 태양을 산책하는 독수리여, 나는 감히 신비스런 미립자의 햇빛 파장이 나의 생(生)을 태양에 연결시킬 것을 꿈꾸도다. 나의 생(生)이 재떨이가 되지 않기 위하여 나의 생(生)이 가면의 얼음집이 되지 않기 위하여 나는 감히 상상하도다. 영원한 궤도 위에서 나의 불이 태양으로 회귀하는 것을. 언제나, 그리고 영원토록. 나의 생명(生命)과 저 방대한 생명(生命)을 연결해 달라, 어떤 방적기계 어떤 안개의 무(無) 속에서 우리의 실은 풀려지는 것인가? 어떤 증발 어떤 채무자인가, 우리들은? 나는 감히 상상하도다, 어둠이 태양을 선행하니까 그리하여 태양이 어둠을 살해하듯..

시(詩)와 詩魂 2021.01.02

꽃들의 제사/김승희

꽃들의 제사/김승희 어떤 그리움이 저 달리아 같은 붉은 꽃물결을 피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혈관 속에 저 푸른 파도를 울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흘러가는 강물 위에 저 반짝이는 햇빛을 펄떡이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끊어진 손톱과 끊어진 손톱을 이어놓는가 어떤 그리움이 시카다(cicada)에게 17년 동안의 지하 생활을 허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시카다에게 한여름 대낮의 절명가를 허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저 비행운과 비행운을 맺어주나 지금 파란 하늘을 보는 이 심장은 뛰고 있다 불타는 심장은 꽃들의 제사다 이 심장에는 지금 유황의 온천수 같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데

시(詩)와 詩魂 2021.01.02

죽도록 사랑해서/김승희

죽도록 사랑해서 -김승희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정말로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이제 듣기가 싫다 죽도록 사랑해서 가을 나뭇가지에 매달려 익고 있는 붉은 감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옥상 정원에서 까맣게 여물고 있는 분꽃 씨앗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한계령 천길 낭떠러지 아래 서서 머나먼 하늘까지 불지르고 있는 타오르는 단풍나무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로 이제 가을은 남고 싶다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핏방울 하나하나까지 남김없이 셀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투명한 가을햇살 아래 앉아 사랑의 창세기를 다시 쓰고 싶다 또다시 사랑의 빅뱅으로 돌아가고만 싶다

시(詩)와 詩魂 2021.01.02

새벽밥 / 김승희

새벽밥 / 김승희 새벽에 너무 어두워 밥솥을 열어 봅니다 하얀 별들이 밥이 되어 으스러져라 껴안고 있습니다 별이 쌀이 될 때까지 쌀이 밥이 될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2 / 김승희. 아침에 눈뜨면 세계가 있다, 당연의 세계가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거기에 있다. 당연의 세계는 왜, 거기에,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처럼, 왜, 맨날, 당연히, 거기에 있는 것일까. 당연의 세계는 거기에 너무도 당연히 잇어서 그 두꺼운 껍질을 벗겨보지도 못하고 당연히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 당연의 세계는 누가 만들었을가,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당연한 사람이 만들었겠지. 당연히 그것을 만들만한 사람, 그것을 만들어도 당연한 사람. 그러므..

시(詩)와 詩魂 2021.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