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장이엽의 작은 것들의 존재론

작은 것들의 존재론 ― 장이엽의 시세계 장석주(시인·문학평론가) 뒷모습을 바라보며 밥을 먹을 때도 맨 뒷줄 끝에 붙어 단체사진을 찍을 때에도 다만 외로울 뿐 사라지거나 죽는 건 아니더군 ― 「생략」 부분 단체사진 속에서 눈을 감는다는 것은 깜박이는 눈동자에서 힘을 빼는 일 대열에서 걸어 나와 기웃거려 보는 일 사소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으려는 카메라와 나의 즐거운 한 판 ― 「단체사진 속에서 눈을 감는다는 것」 부분 두 편의 시에 나오는 구절을 시인의 경험적 사실이라고 그대로 믿는다면, 시인은 단체사진을 찍을 때 맨 뒷줄 끝에 서기를 좋아하고, 또 눈을 감은 적이 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시인이 남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순간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어긋나는 실수를 한다..

시(詩)와 詩魂 2020.11.06

가을의 언어 / 김현승

가을 -김현승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시(詩)와 詩魂 2020.11.01

가을 노트 /문정희

가을 노트 - 문정희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다한 말 못다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잎 두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 가장 깊은 살속에 담아가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시(詩)와 詩魂 2020.11.01

친구/문정희

친구 -문정희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누가 몰랐으랴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끼리도 끝까지 함께 갈 순 없다는 것을... 진실로 슬픈 것은 그게 아니었지 언젠가 이 손이 낙엽이 되고 산이 된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언젠가가 너무 빨리 온다는 사실이지 미처 숨돌릴 틈도 없이 온몸으로 사랑할 겨를도 없이 어느 하루 잠시 잊었던 친구처럼 홀연 다가와 투욱 어깨를 친다는 사실이지

시(詩)와 詩魂 2020.10.23

수학자의 아침 / 김소연

수학자의 아침 / 김소연 나 잠깐만 죽을게 삼각형처럼 정지한 사물들의 고요한 그림자를 둘러본다 새장이 뱅글뱅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안겨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안겨 있는 사람을 더 꼭 끌어안으며 생각한다 이것은 기억을 상상하는 일이다 눈알에 기어들어 온 개미를 보는 일이다 살결이 되어버린 겨울이라든가, 남쪽 바다의 남십자성이라든가 나 잠깐만 죽을게 단정한 선분처럼 수학자는 눈을 감는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숨을 세기로 한다 들이쉬고 내쉬는 간격의 이항대립 구조를 세기로 한다 숨소리가 고동 소리가 맥박 소리가 수학자의 귓전에 함부로 들락거린다 비천한 육체에 깃든 비천한 기쁨에 대해 생각한다 눈물 따위와 한숨 따위를 오래 잊고 살았습니다 잘 살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요 잠깐만 죽을게, 어디서도..

시(詩)와 詩魂 2020.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