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견자見者/박용하

견자見者 박용하 누가 자꾸 삶을 뛰어내리는가 누가 자꾸 초읽기 하듯 심장을 뛰어내리고 있는가 그렇다면 네 영혼은? 네 손목은? 네 발목은? 누가 자꾸 지구를 뛰어내리는가 누가 자꾸 햇빛과 달빛을 뛰어내리는가 눈물도 심장에서 뛰어내린다 그렇다면 네 슬픔은? 네 진눈깨비는? 네 고통은? 너의 심장은 발바닥에서부터 뛴다 너의 노래는 머리카락에서도 자란다 그렇다면 네 피는? 네 시선은? 네 호흡은? 물에 빠진 사람은 물을 짚고 허공에 빠진 사람은 허공을 짚을 때처럼 빠지는 것을 계속 짚을 때처럼 누가 계속 죽음을 뛰어내리는가 누가 계속 초읽기 하듯 심장을 뛰어내리고 있는가

시(詩)와 詩魂 2020.10.06

서풍부(西風賦)/김춘수

서풍부(西風賦) - 김춘수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왼통 풀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시(詩)와 詩魂 2020.10.06

어떤 사람/ 신동집

어떤 사람 - 신동집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별을 돌아보고 늦은 밤의 창문을 나는 닫는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 켠에서 말없이 문을 여는 사람이 있다. 차갑고 뜨거운 그의 얼굴은 그러나 너그러이 나를 대한다. 나즉히 나는 묵례를 보낸다. 혹시는 나의 잠을 지켜 줄 사람인가 지향없이 나의 밤을 헤메일 사람인가 그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창문을 열면 또 한 번 나의 눈을 대하게 된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 켠에서 말없이 문을 닫는 그의 모습을 나즉히 나는 묵례를 보낸다. 그의 잠을 이번은 내가 지킬 차롄가 그의 밤을 지향없이 내가 헤맬 차롄가 차갑고 뜨거운 어진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나와 만난다. 언제나 이렇게 나와 헤어진다.

시(詩)와 詩魂 2020.10.06

바다 /서정주

바다 - 서정주 귀기우려도 있는 것은 역시 바다와 나뿐. 밀려왔다 밀려가는 무수한 물결우에 무수한 밤이 왕래하나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 아- 반딪 딧불만한 등불 하나도 없이 울음에 젖은 얼굴을 온전한 어둠속에 숨기어가지고……너는, 무언의 海深에 홀로 타오르는 한낱 꽃 같은 심장으로 침몰하라. 아- 스스로히 푸르른 정열에 넘처 둥그란 하눌을 이고 웅얼거리는 바다, 바다의 깊이 우에 네구멍 뚤린 피리를 불고…… 청년아. 애비를 잊어버려 에미를 잊어버려 형제와 친척과 동모를 잊어버려, 마지막 네 계집을 잊어버려, 알래스카로 가라 아니 아라비아로 가라 아니 아메리카로 가라 아니 아프리카로 가라 아니 침몰하라. 침몰하라. 침몰하라 ! 오- 어지러운 심장의 무게우에 풀잎처럼 흩날리는 머..

시(詩)와 詩魂 2020.10.06

구름의 파수병/김수영

구름의 파수병 - 김수영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내가 시(詩)와는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먼 산정에 서 있는 마음으로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와 그 주위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정하여진 물체만을 보기로 결심하고 있는데 만약에 또 어느 나의 친구가 와서 나의 꿈을 깨워주고 나의 그릇됨을 꾸짖어주어도 좋다 함부로 흘리는 피가 싫어서 이다지 낡아빠진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먼지 낀 잡초 위에 잠자는 구름이여 고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철 늦은 거미같이 존재 없이 살기도 어려운 일 방 두 칸과 마루 한 칸과 말쑥한 부엌과 애처로운 처를 거느리고 외양만이라도 남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울 수가 있을까 시를..

시(詩)와 詩魂 2020.10.06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베르톨트 브레히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 베르톨트 브레히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행복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산다 그의 목소리는 귀에 거슬리지 않고 그의 얼굴은 깨끗하다 정원의 나무가 기형적인 것은 토양이 나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무를 비난한다 불구자라고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푸른 조각배나 해협의 한가로운 돛을 나는 보지 않는다 내가 보는 것은 어부들의 닳아질대로 닳아진 어망뿐이다 왜 나는 사십대에 허리가 구부러진 토지없는 농부에 대해서만 노래하는가 처녀들의 유방은 옛날처럼 따뜻한데 나의 시에 운율을 맞추면 나에게는 그것이 겉멋을 부리는 것처럼 생각되기까지 한다 나의 내부에서 싸우고 있는 것은 꽃으로 만발한 사과나무에 대한 도취와 저 칠쟁이의 연설에 대한 분노이다 그러자 후자만이 ..

시(詩)와 詩魂 2020.10.06

심장이라는 사물/한강

심장이라는 사물 - 한강 지워진 단서를 들여다본다 희미하게 남은 선의 일부 ㄱ 또는 ㄴ이 구부러진 데 지워지기 전에 이미 비어 있던 사이들 그런 곳에 나는 들어가고 싶어진다 어깨를 안으로 밀고 허리를 접고 무릎을 구부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 희미해지려는 마음은 그러나 무엇도 희미하게 만들지 않고 덜 지워진 칼은 길게 내 입술을 가르고 더 캄캄한 데를 찾아 동그랗게 뒷걸음질치는 나의 혀는

시(詩)와 詩魂 2020.10.06

나무의 수사학/손택수

나무의 수사학 -손택수 꽃이 피었다, 도시가 나무에게 반어법을 가르친 것이다 이 도시의 이주민이 된 뒤부터 속마음을 곧이곧대로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나도 곧 깨닫게 되었지만 살아 있자, 악착같이 들뜬 뿌리라도 내리자 속마음을 감추는 대신 비트는 법을 익히게 된 서른 몇 이후부터 나무는 나의 스승 그가 견딜 수 없는 건 꽃향기 따라 나비와 벌이 붕붕거린다는 것, 내성이 생긴 이파리를 벌레들이 변함없이 아삭아삭 뜯어 먹는다는 것 도로변 시끄러운 가로등 곁에서 허구한 날 신경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피어나는 꽃 참을 수 없다 나무는, 알고 보면 치욕으로 푸르다

시(詩)와 詩魂 2020.10.06

취한 배/A. 랭보

취한 배 -A. 랭보 김학준 옮김 유유한 강물을 타고 내려올 적에, 더 이상 수부들에게 이끌리는 느낌은 아니었어 홍피족들 요란스레 그들을 공격했었지. 색색의 기둥에 발가벗겨 묶어 놓고서 플랑드르 밀과 영국 솜을 져 나르는 선원들이야 내 알 바 아니었어. 배를 끄는 수부들과 함께 그 북새통이 끝났을 때 나 가고 싶은 데로 물살에 실려 내려왔으니. 격하게 출렁이는 조수에 휘말린 지난 겨울, 난, 농아보다 더 먹먹한 골을 쌎바고 헤쳐 나갔지! 떠내려간 이베리아 반도도 그처럼 의기양양한 혼돈을 겪지는 못했을 거야. 격랑은 내가 항행에 눈뜬 것을 축복해 주었어. 코르크 마개보다 더 가벼이 나는 춤추었지, 끊임없이 제물을 말아먹는다는 물결 위에서, 열흘 밤을, 뱃초롱의 흐리멍덩한 눈빛을 그리지도 않으며! 아이들이 ..

시(詩)와 詩魂 2020.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