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내 속의 가을/최영미

내 속의 가을 -최영미 바람이 불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높고 푸른 하늘이 없어도 뒹구는 낙엽이 없어도 지하철 플랫폼에 앉으면 시속 100킬로로 달려드는 시멘트 바람에 기억의 초상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흩어지는 창가에 서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따뜻한 커피가 없어도 녹아드는 선율이 없어도 바람이 불면 오월의 풍성한 잎들 사이로 수많은 내가 보이고 거쳐온 방마다 구석구석 반짝이는 먼지도 보이고 어쩌다 네가 비치면 그림자 밟아가며, 가을이다 담배연기도 뻣뻣한 그리움 지우지 못해 알미늄 샷시에 잘려진 풍경 한 컷, 우수수 네가 없으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팔짱을 끼고 가---을

시(詩)와 詩魂 2020.09.20

정천한해情天恨海/한용운

정천한해情天恨海 -한용운 가을 하늘이 높다기로 정(情) 하늘을 따를 쏘냐. 봄 바다가 깊다기로 한(限) 바다만 못하리라. 높고 높은 정(情)하늘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손이 낮아서 오르지 못하고 깊고 깊은 한(限) 바다가 병 될 것은 없지마는 다리가 짧아서 건너지 못한다. 손이 자라서 오를 수만 있으면 정(情)하늘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다리가 길어서 건널 수만 있으면 한(限) 바다는 깊을수록 묘하니라. 만일 정(情) 하늘이 무너지고 한(恨) 바다가 마른다면 차라리 정천(情天)에 떨어지고 한해(限海)에 빠지리라. 아아 정(情)하늘이 높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이마보다는 낮다. 아아 한(限) 바다가 깊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무릎보다는 얕다. 손이야 낮든지 다리야 짧든지 정(情) 하늘에 오르고 한(限) 바다를 건너..

시(詩)와 詩魂 2020.09.20

이별 이후/문정희

이별 이후 - 문정희 너 떠나간 지 세상의 달력으론 열흘이 되었고 내 피의 달력으론 십년 되었다 나 슬픈 것은 네가 없는데도 밤 오면 잠들어야 하고 끼니 오면 입 안 가득 밥알 떠 넣는 일이다 옛날옛날적 그 사람 되어가며 그냥 그렇게 너를 잊는 일이다 이 아픔 그대로 있으면 그래서 숨막혀 나 죽으면 원도 없으리라 그러나 나 진실로 슬픈 것은 언젠가 너와 내가 이 뜨거움 까맣게 잊는다는 일이다

시(詩)와 詩魂 2020.09.18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복효근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복효근 내가 꽃피는 일이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면 꽃은 피어 무엇하리 당신이 기쁨에 넘쳐 온 누리 햇살에 둘리어 있을 때 나는 꽃 피어 또 무엇하리 또한 내 그대를 사랑한다 함은 당신의 가슴 한복판에 찬란히 꽃피는 일이 아니라 눈두덩 찍어내며 그대 주저앉는 가을 산자락 후미진 곳에서 그저 수줍은 듯 잠시 그대 눈망울에 머무는 일 그렇게 나는 그대 슬픔의 산 높이에서 핀다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시(詩)와 詩魂 2020.09.18

왼손에 대한 데생/강인한

왼손에 대한 데생/강인한 초승달이 떠있다. 달은 내가 끄는 카트 속에서 출렁거린다. 누구는 스푼으로 커피를 저으며 인생을, 나는 월요일 밤 쓰레기를 분류하며 세월을 느낀다. 해묵은 개인적 감정을 버린다. 중학교 1학년 미술시간에 연필로 그린 내 왼손을 버린다. 오래 망설이다가 가라, 돌아오지 마라. 더러운 애착처럼 멀리 내던진다. 오래된 스크랩과 대학 시절 습작노트, 백과사전보다 두터운 총동창회 명부, 유치한 일기장, 눈 시린 추억들은 손잡이 헐거운 부재의 서랍으로 옮긴다. 초승달을 버리고 다음 주엔 보름으로 가는 달을 박스째 출렁출렁 기억의 서랍에서 망각의 서랍으로 옮겨야 한다. 한때는 기쁨으로 빛나던 나를 망각의 강에 내다버린 젊은 연인이여, 놀라지 마라. 두근대는 당신 가슴을 점자처럼 더듬는 건 스..

시(詩)와 詩魂 2020.09.18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릴케

1923년 경 Rainer Maria Rilke와 그의 친구들인 Moodie 및 Reinhardt와 함께...영화배우 무디의 가방을 들고 있는 릴케, 릴케를 끝까지 도와준 친구 라인하르트...오랜시간 시론표지로 쓰는데 영감과 편안함을 준다. 사진이 한편의 시다. Q! 라이너마리아 릴케 시 몇 편을 읽어 본다. 1.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햇빛처럼 꽃보라처럼 또는 기도처럼 왔는가. 행복이 반짝이며 하늘에서 몰려와 날개를 거두고 꽃피는 나의 가슴에 걸려온 것을...... 하얀 국화가 피어있는 날 그 집의 화사함이 어쩐지 마음에 불안하였다. 그날 밤늦게, 조용히 네가 내 마음에 닿아왔다. 나는 불안하였다. 아주 상냥하게 네가 왔다. 마침 꿈 속에서 너를 생각하고 있었다...

시(詩)와 詩魂 2020.09.16

나무로 된 고요/ 심보선

나무로 된 고요 -심보선 나는 나무로 된 고요함 위에 손을 얹는다 그 부드러운 결을 따라 보고 듣고 말한다 그때 기쁨, 영원한 기쁨의 지저귐이 사물들의 원소 속에 숨어 있음을 깨닫는다 하느님은 여느 때처럼 말없이 황금 심장을 가슴속에 품고 계신다 아, 거기서 떨어지는 황금 부스러기들 그 하나하나로 집을 지을 수 있다면 유리와 불과 돌 속에서 지워질 이름이란 없을 것이거늘 쓸모를 모르겠는 완구처럼 하늘의 언저리를 굴러가는 태양 아래 인간은 오래되고 희미한 기쁨의 필적들을 주워 모으는 절박한 수집광 아, 우리가 불안을 조금만 더 견뎠더라면 그것을 하느님이 조금만 더 도와줄 수 있었더라면 유리와 불과 돌 속에서 사라지는 이름이란 없을 것이거늘 나는 양손을 가슴팍 위로 거두어 모은다 망각이 그 부드러운 결을 한..

시(詩)와 詩魂 2020.09.16

고형렬, 유리체를 통과하다

유리체를 통과하다 - 고형렬 눈 밖에 나 있는 존재들 직접 들어올 수 없지만 직립의 낯선 빛은 무한의 깊이로 창을 통과한다 선 채 밑바닥 없이 붙어 염파를 뒤흔든다 빛의 얼굴 밑으로 나는 나를 집어넣으려 한다 조용히 착상하는 피안의 그림자 정원 상공을 건너와, 평면이 되는 빛 바닥 먼지처럼 한번 슥, 얼굴을 쓰다듬지만 손바닥으로 너는 즉시 나의 손등을 비춘다 어떤 간절한 마음도, 앞서 가는 광속의 예언도 너의 빛 위에 놓을 수가 없다 너는 이렇게, 직접 들어오지 않는다 다시 유리체를 통과하고 내 의식체를 비춘 뒤 되돌아 나오는 빛 다발이 수없이 거쳐 가도 우리는 서로 다치지 않는다 나는 이미 너의 오랜 영혼에 매료되었고 창밖에 와 혼자 섰다 --------------

시(詩)와 詩魂 2020.09.16

여, 라는 말/ 나희덕

여, 라는 말/ 나희덕 잊혀진 것들은 모두 여가 되었다 /망각의 물결 속으로 잠겼다가 /스르르 다시 드러나는 바위, 사람들은/그것을 섬이라도고 부를 수 없어 여라 불렀다 /울여, 새여, 대천어멈여, 시린여, 검은여.... /이 이름들에는 여를 오래 휘돌며 지나간/파도의 울음 같은 게 스며 있다 /영영 물에 잠겨 버렸을지도 모를 기억을/ 햇빛에 널어 말리는 동안/ 사람들은 그 얼굴에 이름을 붙여주려 하지만 /그러기 전에 사라져 버리는 여도 있다/ 썰물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그 바위를 향해서도 여, 라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 여가 드러난 것은/ 썰물때가 되어서만은 아니다 /며칠 전부터 물에 잠긴 여 주변을 낮게 맴돌며/ 끊임없이 날개를 퍼덕이던 새들 때문이다 /그 젖은 날게에서도 여, 라는 소리가 들렸다

시(詩)와 詩魂 2020.09.16

가을/ 송찬호

가을 송찬호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 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 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 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않은 꼬투리들이 따닥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멀리 ..

시(詩)와 詩魂 2020.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