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가을밤/ 김용택

가을밤 - 김용택 달빛이 하얗게 쏟아지는 가을 밤에 달빛을 밟으며 마을 밖으로 걸어나가보았느냐 세상은 잠이 들고 지푸라기들만 찬 서리에 반짝이는 적막한 들판에 아득히 서보았느냐 달빛 아래 산들은 빚진 아버지처럼 까맣게 앉아 있고 저 멀리 강물이 반짝인다 까만 산속 집들은 보이지 않고 담뱃불처럼 불빛만 깜박인다 하나 둘 꺼져가면 이 세상엔 달빛뿐인 가을 밤에 모든 걸 다 잃어버린 들판이 들판 가득 흐느껴 달빛으로 제 가슴을 적시는 우리나라 서러운 가을 들판을 너는 보았느냐.

시(詩)와 詩魂 2020.09.16

양심의 금속성/ 김현승

양심의 금속성 - 김현승 모든 것은 나의 안에서 물과 피로 육체를 이루어 가도, 너의 밝은 은빛은 모나고 분쇄(粉碎)되지 않아 드디어 무형(無形)하리만큼 부드러운 나의 꿈과 사랑과 나의 비밀을, 살에 박힌 파편(破片)처럼 쉬지 않고 찌른다. 모든 것은 연소되고 취(醉)하여 등불을 향하여도 너만은 끌려 나와 호올로 눈물을 맺는 달밤…… 너의 차가운 금속성(金屬性)으로 오늘의 무기(武器)를 다져가도 좋을, 그것은 가장 동지적(同志的)이고 격렬한 싸움! ​

시(詩)와 詩魂 2020.09.10

가을이 아름다운 건 / 이해인

가을이 아름다운 건 - 이해인 구절초, 마타리, 쑥부쟁이꽃으로 피었기 때문이다. 그리운 이름이 그리운 얼굴이 봄 여름 헤매던 연서들이 가난한 가슴에 닿아 열매로 익어갈 때 몇 몇은 하마 낙엽이 되었으리라. 온종일 망설이던 수화기를 들면 긴 신호음으로 달려온 그대를 보내듯 끊었던 애잔함... 뒹구는 낙엽이여... 아, 가슴의 현이란 현 모두 열어 귀뚜리의 선율로 울어도 좋을 가을이 진정 아름다운 건 눈물 가득 고여오는 그대가 있기 때문이리

시(詩)와 詩魂 2020.09.10

오늘/심재휘

오늘 -심재휘 한 그루의 느티나무를, 용서하듯 쳐다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얼마나 행복한 것이냐 저녁이 되자 비는 그치고 그 젖은 나무에도 불이 들어온다 내가 마른 의자를 찾아 앉으면 허튼 바람에도 펼쳐진 책이 펄럭이고 몇 개의 문장들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러면 길 위에 떨어진 활자들 서둘러 주울 때 느닷없이 다가와 말을 거는 수많은 어둠들 저 느티나무 밑을 지나는 오래된 귀가도 결국 어느 가지 끝에서 버스를 기다릴 테지 정류장에서 맞이하는 미래처럼 서로 닮은 가지들의 깜박거리는 불빛 속마다 조금씩 다른 내가, 조금씩 다른 표정으로 앉아 있을 테지, 벗겨도 벗겨도 끝내 속내를 보여 주지 않는 오늘들 그런 것이다 생의 비밀을 훔쳐본 듯 내게로 온 투명한 하루가, 서서히 그러나 불치병처럼 벗겨지는 풍경을..

시(詩)와 詩魂 2020.09.10

'나'라는 말/ 심보선

'나'라는 말 -심보선 나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판돈인 양 나는 인생에 `나'라는 말을 걸고 숱한 내기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혹 나는 `나'라는 말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어느 날 밤에 침대에 누워 내가 `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지평선처럼 아득하게 더 멀게는 지평선 너머 떠나온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나'라는 말이 공중보다는 밑바닥에 놓여 있을 때가 더 좋습니다. 나는 어제 산책을 나갔다가 흙길 위에 누군가 잔가지로 써 놓은 `나'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그 누군가는 그 말을 쓸 때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그 역시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거나 홀로 나아갈 지평선을 바라보며 땅 위에 `나'라고 썼던 것이겠지요. 나는 문득 그 말을 보호해주고 싶어서 자갈들을..

시(詩)와 詩魂 2020.09.04

은,는,이,가 /정끝별

은,는,이,가 - 정끝별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을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

시(詩)와 詩魂 2020.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