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길이 다하다/김사인

길이 다하다 -김사인 ​ ​ 풀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저 야윈 실핏줄들 빗방울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 이미 저질러진 일들이여 완성된 실수여 ​ 아무리 애써도 남의 것만 같은 저 납빛의 두꺼운 하늘 잠시 사랑했던 이름들 ​ 이제 나에게 어떤 몸이 용납될 것인가 설움에 눌린 발바닥과 무릎뼈는 어느 달빛에 하얗게 마를 것인가

시(詩)와 詩魂 2020.08.16

나는 너의 일곱시다 외/ 이준규

나는 너의 일곱시다 -이준규 나는 너의 일곱시다. 너는 나로부터 멀어진다. 나는 너의 잠으로 들어간다. 너의 일곱시는 잠 속에 있다. 나는 너를 잡으러 너의 잠에 들어간다. 나는 너의 일곱시다. 나는 지금 시를 쓰고 있다. 나는 지금 시를 쓰며 너를 생각한다. 나는 지금 시를 쓰며 너를 생각하며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 나는 네가 마실 수도 있는 커피를 마시고 네가 피울 수도 있는 담배를 피운다. 네가 좋아하는 에그 타르트는 지금 내 앞에 없다. 하지만 나는 네가 좋아하는 에그 타르트를 상상할 수 있다. 나는 지금 내가 상상한 네가 좋아하는 에그 타르트를 먹으며 너의 잠 속에 있다. 나는 지금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며 시를 쓰며 에그 타르트를 먹으며 너의 잠 속으로 들어가 너를 가지고 있다. 너..

시(詩)와 詩魂 2020.08.16

오래 전 나는 휘파람이었다/ 김경주

오래 전 나는 휘파람이었다/ 김경주 -1 바다로 가는 길 휘파람은 바람 위에 띄우는 가늘고 긴 섬이다 외로운 이들은 휘파람을 잘 분다 나무가 있는 그림들을 보면 휘파람을 불어 흔들어 주고 도화지 끝에서 푸른 물소 때를 불러오고 싶다 대륙을 건너오는 바람들도 한때는 누군가의 휘파람이었으리라 어느 유년에 내가 불었던 휘파람이 내곁을 지금 스치는 것이리라 죽어 가는 사람 입 속에 휘파람을 불어넣어 주고 싶다 고 말한 적이 있다 죽은 사람의 입에 휘파람을 불어넣어 주면 나는 잠시 그에게 옮겨가는 것이다 내 휘파람에선 아카시아냄새가 난다 유년을 향해 휘파람을 불면 꼭 그 냄새가 난다 자전거위에서 부는 휘파람이 내 학업이었다 헌책방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골방에 엎드려 그 책 속에 불어넣었던 휘파람이 숨쉬고 있다 ..

시(詩)와 詩魂 2020.08.09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진은영 ​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 시인의 독백 "어둠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 곳에 살지 않는다

시(詩)와 詩魂 2020.08.09

유리의 존재/ 김행숙

유리의 존재 - 김행숙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통과할 수 없는 것을 만지면서…… 비로소 나는 꿈을 깰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벽이란 유리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넘어지면 깨졌던 것이다. 그래서 너를 안으면 피가 났던 것이다. 유리창에서 손바닥을 떼면서…… 생각했다. 만질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검은 눈동자처럼 맑게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보는 것과 같지 않았을까. 유리는 어떤 경우에도 표정을 짓지 않는다. 유리에 남은 손자국은 유리의 것이 아니다. 유리에 남은 흐릿한 입김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제발 내게 돌을 던져 줘. 안 그러면 내가 돌을 던지고 말 거야. 나는 곧, 곧,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야 말 것 같다. 오늘에야 비로소 나는 죽음처럼 항..

시(詩)와 詩魂 2020.08.09

언급되고 있다/김성호

언급되고 있다 -김성호 ​ 빛과 다른 포효였고 가져본 적 없는 두려움인 모든 것의 느껴본 적 없는 의지, 그 충일은 너무도 나를 복종키에 충분했다. 열연함으로도 없다. 사사로운 의사도 없다. 자의는 영영 새롭지 못하다. 다 살아내는 순간이다. 아직도 보인다. 이로움이기에 조화롭다. 그 까닭을 알기에 원하였던 방종을 틈탄다. 다음 문장에 능하다. 그마저 맞닥뜨린, 그러나 이로움이기에 그러한 순간도허락지 않는다. 만족하는 비인 곳,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 까다롭고도 무료한 나란히 더는 드나들 수 없는 일치가 되어 차단함을 다 불러들이는 현격하고도 대게는 반경을 잃은 낱말들로 날카롭게 꿈만 같은 나를 나는 사랑하지도 사랑한 적도 없다. 부스러짐을. 그러한 달함이 모든 고조를 끌고 가 꺼트린 그 너머에 부린 ..

시(詩)와 詩魂 2020.08.09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 박정대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 박정대 바보 같은 로맹 가리, 영혼의 발전소를 짓겠다니! 차라리 나는 별을 노래하겠어, 깊은 어둠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새 그러나 가령 톱밥난로의 첫 페이지, 스웨터의 두 번째 영혼 그리고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같은 거 그래서 나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들으며 글을 쓰네, 담배를 피우네, 담배를 피우면 자꾸만 그대 생각이 나 시커먼 커피를 마시네 나는 빈곤과 허탈의 대지에서 왔네 심장의 내륙에서 혹한의 영혼까지 바람을 거슬러 오르는 횡단의 어려움, 집시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 나는 무모한 패관, 나는 생의 백지위임장을 들고 몽상과 연민이 끝난 저 먼 대지로부터 왔네 생은 마치 처절한 화학반응과도 같아서 실패한 실험처럼 황폐하게 돋아난 낡은 시간의 깃발이 여기에 ..

시(詩)와 詩魂 2020.08.09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 이성부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 이성부 내가 걷는 백두대간 133 작은 산이 큰 산 가리는 것은 살아갈수록 내가 작아져서 내 눈도 작은 것으로만 꽉 차기 때문이다 먼데서 보면 크고 높은 산줄기의 일렁임이 나를 부르는 은근한 손짓으로 보이더니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봉우리 제 모습을 감춘다 오르고 또 올라서 정수리에 서는데 아니다 저어기 저 더 높은 산 하나 버티고 있다 이렇게 오르는 길 몇번이나 속았는지 작은 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나를 가두고 그때마다 나는 옥죄어 눈 바로 뜨지 못한다 사람도 산속에서는 미물이나 다름없으므로 또 한번 작은 산이 백화산 가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것도 하나의 질서라는 것을 알았다 다산은 이것을 일곱살 때 보았다는데 나는 수십년 땀 흘려 산으로 돌아다니면서 예순 넘어서야 깨닫는..

시(詩)와 詩魂 2020.08.04

물속에서/진은영

물속에서 -진은영 가만히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내가 모르는 일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떨고 있는 일 나는 잠시 떨고 있을 뿐 물살의 흐름은 바뀌지 않는 일 물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푸르던 것이 흘러와서 다시 푸르른 것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투명해져 나를 비출 뿐 물의 색은 바뀌지 않는 일 (그런 일이 너무 춥고 지루할 때 내 몸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볼까?)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조금씩 젖어드는 일 내 안의 딱딱한 활자들이 젖어가며 점점 부드러워지게 점점 부풀어 오르게 잠이 잠처럼 풀리고 집이 집만큼 커지고 바다가 바다처럼 깊어지는 일 내가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내 안의 붉은 물감 풀어놓고 흘러가는 일 그 물빛에 나도 잠시 따스해지는 그런 상상 속에서 물속에..

시(詩)와 詩魂 2020.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