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나는 달을 믿는다/박형준

달 -박형준 너를 올려다보면 너는 상처를 입고 있구나 벌써 상처 속에서 환하구나 감정을 끝까지 실험하다 미쳐버린 시인같이 상처가 시인 너는 상처의 수집가인 너는 골짜기마다 누군가를 잊지 못해 올려다보는 눈길로 깊어가는구나 ................... 나는 달을 믿는다 - 박형준 달에 골목을 낼수 있다면 이렇게 하리. 서로 어깨를 비벼야만 통과 할 수 있는 골목 그런 골목이 산동네를 이루고 높지만 낮은 집들이 흐린 삼십 촉 백열전구가 켜진 창을 가지고 있는 달 나는 골목의 계단을 올라가며 집집마다 흘러나오는 불빛을 보며 울리라. 판잣집을 시루떡처럼 쌓아 올린 골목의 이집 저집마다 그렇게 흘러 나오는 불빛을 모아 나는 주머니에 추억같은 시를 넣고 다니리. 저녁이 이슥해지면 달의 골목 어느 집으로 들어..

시(詩)와 詩魂 2020.07.28

당신의 심장을 나에게/이이체

당신의 심장을 나에게 - 이이체 당신과 재회했다. 이별은 헤어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래 살게 되는 병에 걸리게 한다. 내 기억은 당신에게 헤프다. 어쩌면 이리도 다정한 독신을 견딜 수 있었을까. 세상에는 틀린 말이 한마디도 없다. 당신의 기억이 퇴적된 검은 지층이 내 안에 암처럼 도사리고 있다. 어떤 망각에 이르러서는 침묵이 극진하다. 당신은 늘 녹슨 동전을 빨고 우는 것 같았다. 손이 잘린 수화(手話)를 안다. 우리는 악수를 손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추상의 무덤에서 파낸 당신의 심장을 냇가에 가져가 씻는다. 누가 버린 목어(木魚)를 주웠다. 살덩어리가 단단해서 더 비렸다. 속마음을 다 드러내면 저토록 비리게 굳어버린다던, 당신의 이야기. 이따금씩 부화하는 짐승의 말. 지금 쉬운 것은 훗날에는 아쉬운 것..

시(詩)와 詩魂 2020.07.28

비 오는 날의 재회/ 최승자

비 오는 날의 재회 - 최승자 하늘과 방 사이로 빗줄기는 슬픔의 악보를 옮긴다 외로이 울고 있는 커피잔 無爲를 마시고 있는 꽃 두송이 누가 내 머릿속에서 오래 멈춰 있던 현을 고르고 있다. 가만히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까. 흙 위에 괴는 빗물처럼 다시 네 속으로 스며들 수 있을까.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너는 생생히 웃는데 지나간 시간을 나는 증명 할 수 없다. 네 입맞춤 속에 녹아 있던 모든 것을 다시 만져 볼 수 없다. 젖은 창 밖으로 비행기 한 대가 기울고 있다 이제 결코 닿을 수 없는 시간 속으로.

시(詩)와 詩魂 2020.07.28

행복/ 유치환

행복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시(詩)와 詩魂 2020.07.17

즐거운 편지/황동규

즐거운 편지 -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 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 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메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 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시(詩)와 詩魂 2020.07.17

모래처럼 외로운 이유/ 이진명

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안다 -이진명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모래처럼 외로운지를 알았다 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음을 안다 그리고 모든 망가지는 것들이 한때는 새것이었음을 하지만 나에게 무슨 영광이 있었던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세상을 바라보았으나 사람들은 내가 한쪽 눈으로만 본다고 그래서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다고 세상은 그렇게 일목요연한 게 아니라고 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다른 무엇일 거라고 결코 상상해서는 안된다고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이념을 내려놓으라고 그런데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버릴 수 없는 꿈이 있기에 나는 내가 많이 망가졌음을 알면서도 아직 망가지지 않았다고 우기면서 내가 더 망가지기 전에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아서 그래서 나는 더..

시(詩)와 詩魂 2020.07.17

님의 침묵/한용운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시(詩)와 詩魂 2020.07.12

초혼(招魂)/김소월

초혼(招魂) - 金素月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虛空中)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主人)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西山)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山) 위에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시(詩)와 詩魂 2020.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