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파울 첼란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 파울 첼란 아무도 흙과 진흙을 반죽하여 우리를 만들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티끌인 우리를 축복하지 않으리라 아무도 아무도 아닌 분이시여, 찬양 받으소서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는 꽃을 피우길 원하나이다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또한 아무것도 아니오니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꽃으로 남아 있나이다. 아무것도 아닌 장미 아무도 아닌 분의 장미로 영혼의 정결함으로 황량한 사막과 같은 하늘의 휘장이 찢어지던 날 말 그대로 핏빛같이 붉은 진홍빛의 붉은 면류관을 우리는 노래하였나이다 가시 무성한 면류관을 Wurfscheibe,mit vorgesichten besternt, wirf dich aus dir hinhaus 예견들로 성좌를 이룬 원반, 너를 던져라 너 자신 ..

시(詩)와 詩魂 2020.06.02

시, 한 잔의 붉은 환지통

시, 한 잔의 붉은 환지통-김혜순, 「한 잔의 붉은 거울」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는 시가 어떻게 씌어지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가 씌어 졌다는 것은 시인이 겪고 있는 ‘환지통’을 다시 반복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환지통(幻肢痛)은 팔다리를 절단한 환자가 이미 없는 수족에 아픔과 저림을 느끼는 현상이다. 시인에게 환지통은 포기할 수 없는 '환(幻)'이다. 아니, 시인에게 ‘환지통(幻肢痛)’이란 ‘'환(幻)’이 없다면 그는 결코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므로, 환지통은 시인의 사용설명서이자, 존재증명서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시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 속에 재현된 화자의 환지통을 함께 겪어 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렇다면, 시를 읽는 독자가 갖고 있는 환지통이 없다면 그..

시(詩)와 詩魂 2020.05.28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모든 것은 죽어 없어지리라.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리라. /생명을/주관하는 자는/암흑의 혹성 저 너머로/마지막 태양의/마지막 빛까지도 불사르리라./오직/나의 고통만이/더욱 가혹하다-/나는 서 있다,/불 속에 휘감긴 채로,/상상도 못 할 사랑의/끌 수 없는 커다란 불길 위에.”(마야코프스키가 1917년에 쓴 장시 에서) 1930년 4월 14일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의 모스크바. 월초에는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이제는 날씨가 한결 따뜻해져 사람들의 옷차림도 화사해졌다. “탕!” 그런데 어디선가 화사한 옷차림을 어지럽게 만들어버리는 한 발의 총소리가 울렸다. 정부 출판국 사무실 근처의 작은 방에서 난 소리였다. 그 방문을 나와 걷던 여자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곧 그 작은 방에서 일어난 비극이..

시(詩)와 詩魂 2020.05.21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릴케

"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누구의 잠도 아니고픈 마음이여. Rose, oh reiner Widerspruch, Lust, Niemandes Schlaf zu sein unter soviel Lidern. " -릴케의 묘비명 장미의 내부 - 릴케 1. 어디에 이 내부에 대한 외부가 있는 것일까? 어떤 상처에 이런 정결한 꽃잎을 얹어야 할 것인가? 어느 하늘이 이 속 활짝 피어난 장미의 안쪽 호수에 비추는 것일까? 그대 근심 모르는 장미여, 보라 꽃잎들 흐느러져 흐느러져 겹쳐 있다. 떨리는 손길로 어루만져도 흩어질 것 같지 않다. 스스로 견디기가 어려울 것 같구나. 장미는 송이마다 넘쳐흘러서 긴긴 여름날이 부풀어 올라 꿈속의 방(房)이 되어 여물게 될 때까지 흘러서 흘러서 내..

시(詩)와 詩魂 2020.05.20

5월의 시/이해인

수유리 가르멜 수녀원 성당 입구의 성모자상 5월의 시 - 이해인 풀잎은 풀잎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초록의 서정시를 쓰는 오월 하늘이 잘보이는 숲으로 가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게 하십시오 피곤하고 산문적인 일상의 짐을 벗고 당신의 샘가에서 눈을 씻게 하십시오 물오른 수목처럼 싱싱한 사랑을 우리의 가슴속에 퍼올리게 하십시오 말을 아낀 기도속에 접어둔 기도가 한송이 장미로 피어나는 오월 호수에 잠긴 달처럼 고요이 앉아 불신했던 날들을 뉘우치게 하십시오 은총을 향해 깨어있는 지고한 믿음과 어머니의 생애처럼 겸허한 기도가 우리네 가슴속에 물 흐르게 하십시오 구김살 없는 햇빛이 아낌없이 축복을 쏟아내는 오월 어머니 우리가 빛을 보게 하십시오 욕심 때문에 잃었던 시력을 찾아 빛을 향해 눈뜨는 빛의 자녀가 되게 하십시오

시(詩)와 詩魂 2020.05.16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 (낭송 이금희)

[詩]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낭송 이금희) Youtube | 2014.12.11. | 재생수6,091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 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 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

시(詩)와 詩魂 2020.05.15

미라보 다리/기욤 아폴리네르

척박한 이 시대에 문학이란 무엇이며 사랑이란 무엇인가. 시간의 물굽이를 오르내리며 이렇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다리의 의미는 또 어떤가. 다리는 강의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을 연결하는 물리적 교량이며 현실과 꿈을 이어주는 정신의 가교이기도 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돌아오는 길목. 다리는 사랑과 이별의 접점이며 희망과 좌절의 변곡점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피안의 세계가 거기에 있다. 이곳은 소멸과 부활의 명암이 교차하는 길이자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영혼의 통로다. 그 옛날 아폴리네르도 이 다리에서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사색에 잠겼으리라. 이것이 그의 눈길이 머물던 자리, 그가 서서 바라보던 강물, 그가 시를 썼던 장소를 순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이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시(詩)와 詩魂 2020.05.13

타오르는 책 / 남진우

타오르는 책 남진우 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지위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다 읽고 나면 두 손엔한 웅큼의 재가 남을 뿐 눌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나는 불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물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엔태울 수 없어 타오르지 않는 책..

시(詩)와 詩魂 2020.05.04

그 복숭아 나무 곁으로/나희덕

그 복숭아 나무 곁으로/나희덕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 꽃과 분홍 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 꽃과 분홍 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저녁이 오는 소리 가만히 들었습니다.

시(詩)와 詩魂 2020.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