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가난한 이름에게 / 김남조

가난한 이름에게 - 김남조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여인을 만나지 못해 당신도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까 검은 벽의 검은 꽃 그림자 같은 어두운 향료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겨울 밤 고독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때문에 어딘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때문에 때로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라는 가난한 ..

시(詩)와 詩魂 2020.07.12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 최승자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 최승자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들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시(詩)와 詩魂 2020.07.09

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에 / 한용운

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에 / 한용운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는 살 깊은 광음을 따라서 달음질 칩니다. 논개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그대는 어디 있느뇨. 죽지 않는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고나. 나는 황금의 칼에 베어진 꽃과 같이 향기롭고 애처로운 그대의 당년을 회상한다. 술 향기에 목맺힌 고요한 노래는 옥에 묻힌 썩은 칼을 울렸다. 춤추는 소매를 안고 도는 무서운 찬바람은 귀신 나라의 꽃수풀을 거쳐서 떨어지는 해를 얼렸다. 가냘핀 그대의 마음은 비록 침착하였지만 떨리는 것보다도 더욱 무..

시(詩)와 詩魂 2020.07.09

나 때문에도 우는 여인이 있는가/ 김영승

http://www.youtube.com/watch?v=m48aguBOdyI 50502^34CDGUC2OvPSnPsiSq 나 때문에도 우는 여인이 있는가.... -김영승 그렇다면 나는 행복합니다. 나 때문에도 상처 받은 여인이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행복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주는 것이라 할 때 사랑한다는 것은 기쁨만, 행복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만 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주는 것이라 할 때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주는 것입니다. 슬픔도 고통도 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것은 그 모든 희로애락애오욕을 다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탐스러운 열매를 따듯 그렇게 좋은 것, 아름다운 것, 편안한 것, 재미있는 것, 기쁘고 즐거운 것..... 그러한 것만 똑 ..

시(詩)와 詩魂 2020.07.08

나쁜 소년이 서 있다/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허연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너무나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은 수 있는 것..

시(詩)와 詩魂 2020.07.08

슬픔의 힘 / 권경인

슬픔의 힘 - 권경인 남은 부분은 생략이다 저 물가, 상사화 숨막히게 져내려도 한번 건넌 물엔 다시 발을 담그지 않으리라 널 만나면 너를 잃고 그를 찾으면 이미 그는 없으니 십일월에 떠난 자 십일월에 돌아오지 못하리라 번뇌는 때로 황홀하여서 아주 가끔 꿈속에서 너를 만난다 상처로 온통 제 몸 가리고 서 있어도 속이 아픈 사람들의 따뜻한 웃음 오래 그리웠다 산을 오르면서 누구는 영원을 보고 누구는 순간을 보지만 애써 기다리지 않아도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사람이 평생을 쏟아부어도 이루지 못한 평화를 온몸으로 말하는 나무와 풀꽃같이 그리운 것이 많아도 병들지 않은 무욕의 정신이여 그때 너는 말하리라 고통이라 이름한 지상의 모든 일들은 해골 속 먼지보다 가볍고 속세의 안식보다 더한 통속 없으니 뼈아픈 사..

시(詩)와 詩魂 2020.07.08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프랑시스 잠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 -프랑시스 잠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나무병에 우유를 담는 일, 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 밀 이삭들을 따는 일, 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들 옆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일, 숲의 자작나무들을 베는 일, 경쾌하게 흘러가는 시내 옆에서 버들가지를 꼬는 일, 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 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어린 아이들 옆에서 늙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 한밤중 귀뚜라미들이 날카롭게 울 때 처지는 소리를 내며 베틀을 짜는 일, 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만드는 일, 정원에 양배추와 마늘의 씨앗을 뿌리는 일, 그리고 따뜻한 달걀들을 거두어들이는 일. The Truly Great Works of Man The truly great works of man are as ..

시(詩)와 詩魂 2020.07.07

청포도 / 이육사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흠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시(詩)와 詩魂 2020.07.01

시가 내게로 왔다/ 파블로 네루다

시가 내게로 왔다 -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다.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겨울에서였는지 강에서였는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아니,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言)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밤의 가지들로부터,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얼굴도 없이 거기에 지키고 섰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다. 난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나의 입은 이름 부를 줄 몰랐고 나는 눈멀었었다. 그런데 무언가 내 영혼 속에서 꿈틀거렸다. 열병 혹은 잃어버린 날개들이 그 불에 탄 상처를 해독하며 난 고독해져 갔다. 그리고 막연하게 첫 행을 썼다. 형체도 없이, 어렴풋한, 순전한 헛소리, 쥐뿔도 모르는 자의 순량한 지혜 그때 ..

시(詩)와 詩魂 2020.06.11

미의 진경 혹은 언어의 시적 전유 : 『처용단장』을 중심으로

미의 진경 혹은 언어의 시적 전유 -『처용단장』을 중심으로 김석준 -문인은 세계의 적이다- 보들레르, 「발가벗겨진 나의 마음」중, 『악의 꽃』 1. 처용은 기표다 : 언어미학의 존재적 층위 미가 헤겔의 이념과 칸트의 순수한 형식 사이를 종주하는 운동일 때, 이 미의 운동을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 양자의 변주 통일 속에 미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대극점으로의 휨 작용이 미의 극한값인가. 사실 미의 정체를 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미 그 자체를 무엇으로 인지하는가.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 미일 때, 그 미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떠한 형상으로 드러나는가. 또 미가 형식의 다양한 변주 위에 핀 개별자들의 특수자로의 고양일 때, 그 미를 어떤 방식으로 인지 포착하는가. 미의 운동은 ..

시(詩)와 詩魂 2020.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