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어느 푸른 저녁/기형도

어느 푸른 저녁 -기형도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글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

시(詩)와 詩魂 2020.08.02

인기척/이병률

인기척 -이병률 한 오만 년쯤 걸어왔다며 내 앞에 우뚝 선 사람이 있다면 어쩔테냐. 그 사람 내 사람이 되어 한 만 년쯤 살자고 조른다면 어쩔테냐. 후닥닥 짐 싸들고 큰 산 밑으로 가 아웅다웅 살 테냐 소리소문 없이 만난 빈 손의 인연으로 실개천 가에 뿌연 쌀뜨물 흘리며 남 몰라라 살 테냐. 그렇게 살다, 그 사람이 걸어왔다는 오만 년이 오만 년 세월을 지켜온 지구의 나무와 무덤과 이파리와 별과 짐승의 꼬리로도 다 가릴 수 없는 넓이와 기럭지라면 그때 문득 죄지은 생각으로 오만 년을 거슬러 혼자 걸어갈 수 있겠느냐. 아침에 눈뜨자마자, 오만 개의 밥상을 차려 오만 년을 노래 부르고, 산 하나를 파내어 오만 개의 돌로 집을 짓자 애교 부리면 오만 년을 다 헤아려 빚을 갚겠느냐. 미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

시(詩)와 詩魂 2020.08.02

풀잎/박성룡

풀잎 - 박성룡 Ⅰ 너의 이름이 부드러워서 너를 불러 일으키는 나의 성대(聲帶)가 부드러워서 어디에 비겨 볼 의미(意味)도 없이 그냥 바람 속에 피어 서 있는 너의 그 푸른 눈길이 부드러워서 너에게서 피어 오른 푸우런 향기가 너에게서 일어나는 드높은 음향(音響)이 발길에 어깨 위에 언덕길에 바위 틈에 허물어진 거리 쓰러진 벽(壁) 틈에 그냥 저렇게 피어 서 있는 너의 양자(樣姿)가 부드러워서 아 너의 온갖 지상(地上)의 어지러운 사상(事象)에 관한 싱싱한 추리(推理)가 부드러워서...... Ⅱ 꽃보다 밝은 이름 물방울보다 맑은 이름 흙보다 가까운 이름 칼끝보다 날카로운 이름 풀잎이여, 아 너 홀로 어디에고 살아 있는 이름이여.

시(詩)와 詩魂 2020.08.02

풍경의 깊이/김사인

풍경의 깊이 -김사인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이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 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

시(詩)와 詩魂 2020.08.02

거의 모든 아침/김안

거의 모든 아침 -김안 거의 모든 아침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당신의 눈동자 속에는 침묵이 가득한 채 한 걸음의 높이로 떠다니는 가볍고 둥근 돌들이 당신의 하얀 발 위에 앉아 천천히 모래가 되어갈 때 당신이 바이올린처럼 작게 섬세하고 헛되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때 거의 모든 아침은 당신이었다가 당신이 아니었다가 음률에서 나온 투명한 불꽃은 나뭇가지를 두드리고 가볍게 나뭇잎 떨어져내리고 거미줄에 걸린 날벌레 하나가 고요히 날아오르고 거의 모든 아침들 속에서 당신이 내게 건네준 몇 개의 언어들이 선명히 줄을 그으며 사라져갈 때 벽 속을 달리던 사내들이 당신의 눈동자를 열어 당신의 시선으로 성냥불을 그을 때 거의 모든 아침은 당신이었다가 당신이 아니었다가 거의 모든 아침 당신은 내..

시(詩)와 詩魂 2020.08.02

누란(樓蘭) /김춘수

누란(樓蘭) - 김춘수 과벽탄(戈壁灘) 고비는 오천리(五千里) 사방(四方)이 돌밭이다. 월씨(月氏)가 망(亡)할 때, 바람 기둥이 어디선가 돌들을 하늘로 날렸다. 돌들은 천년(千年)만에 하늘에서 모래가 되어 내리더니, 산 하나를 만들고 백년(百年)에 한 번씩 그들의 울음을 울었다. 옥문(玉門)을 벗어나면서 멀리멀리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奬)도 들었으리. 명사산(鳴沙山) 그 명사산(鳴沙山) 저쪽에는 십년(十年)에 한 번 비가 오고, 비가 오면 돌밭 여기저기 양파의 하얀 꽃이 핀다. 봄을 모르는 꽃. 삭운(朔雲) 백초련(白草連). 서기(西紀) 기원전(紀元前) 백이십년(百二十年). 호(胡)의 한 부족(部族)이 그 곳에 호(戶) 천 오백 칠십(千五百七十), 구(口) 만 사천백(萬四千百), 승병(勝兵) 이천..

시(詩)와 詩魂 2020.07.30

생명(生命)의 서(書) /유치환

생명(生命)의 서(書) -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沙漠)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ㅎ게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시(詩)와 詩魂 2020.07.30

눈물은 왜 짠가/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

시(詩)와 詩魂 2020.07.30

뼈아픈 후회/ 황지우

뼈아픈 후회 -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에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밀려와 있고 뿌리채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 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신상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음으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시(詩)와 詩魂 2020.07.30

보리수 나무 아래로 /김승희

보리수 나무 아래로 -김승희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나무 아래 길이 있을까, 난 그런 것을 잊어버렸어, 아니 차라리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정직하겠지, 잊어버린 사람은 잃어버린 사람 잃어버린 것을 쉽게 되찾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한밤중에 일어나 시간 속에 종종 성냥불을 그어보지, 내가 잃어버린 무슨 나무 아래 길이 혹여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 혹시 장미나무 아래로 가는 길이 물푸레 나무 아래 휘여진 히아신스 꽃길이 어디 어둠의 담 저 너머 흔적 같은 향기로 날 부르러 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난 청춘을 졸업한 게 아니라 청춘을 중퇴한 듯해. 청춘에서 휴학하고 있는 듯한 그래서 곧 청춘에 복학해야 할 듯한 그런 위태로운 아편길 위에서 난 정말 미친 듯이 뛰었지, 아, 그래, 정..

시(詩)와 詩魂 2020.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