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살아 있다는 것은 /문정희

살아 있다는 것은 문정희 살아 있다는 것은 파도처럼 끝없이 몸을 뒤집는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몸을 뒤집을 때마다 악기처럼 리듬이 태어나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암각화를 새기는 것이다 그것이 대단한 창조인 양 눈이 머는 것이다 바람에 온몸을 부딪치며 쉬지 않고 바위에게 흰손을 내미는 것이다 할랑이는 지느러미가 되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순간마다 착각의 바늘이 돋는 것이다

시(詩)와 詩魂 2020.08.26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 ​ 겨울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 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없이 오래 찔렸다 ​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오래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 그리고 지금, 주인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시(詩)와 詩魂 2020.08.26

내가 너를 &별/ 나태주

내가 너를 -나태주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요,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별 -나태주 너무 일찍 왔거나 너무 늦게 왔거나 둘 중에 하나다 너무 빨리 떠났거나 너무 오래 남았거나 또 그 둘 중에 하나다 누군가 서둘러 떠나간 뒤 오래 남아 빛나는 반짝임이다 손이 시려 손조차 맞잡아 줄 수가 없는 애달픔 너무 멀다 너무 짧다 아무리 손을 뻗쳐도 잡히지 않는다 오래오래 살면서 부디 나 잊지 말아다오.

시(詩)와 詩魂 2020.08.26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허수경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허수경 내일은 탈상 오늘은 고추모를 옮긴다. 홀아비 꽃대 우거진 산기슭에서 바람이 내려와 어린 모를 흔들때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남녘땅 고추밭 햇빛에 몸을 말릴 적 떠난 사람 자리가 썩는다 붉은 고추가 익는다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시(詩)와 詩魂 2020.08.26

지금 알고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류시화

지금 알고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류시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

시(詩)와 詩魂 2020.08.26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선운사 도솔암 계곡에서 흘러고인 물.... 하늘과 호수가 만나... 선운사 골짜기에서 스며든 늪, 밥풀처럼 떠있는 애기연꽃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 2h Repeat ] Chopin) _ Etude Op.10 No.3 Tristesse

시(詩)와 詩魂 2020.08.16

씻음에 대하여 /김정환

씻음에 대하여 -김정한 아침 숲 속 안개 샘물에 얼굴을 씻으며, 씻겨져 내리는 귓가에 보이는 것에 대한 그대의 자그마한 비명 소리 듣는다. 땀흘리고 분노하고 사랑하는 것 그게 후줄그레 씻음의 행위라고, 나는 말했지만 그대는 믿지 않았다. 세상은 참 더러워요. 추해요. 치사해요. 아침 한기 온몸에 소름 바닥에 바위와 풀잎이 투명한 샘물에 얼굴을 씻으며 입김이 호호 냇물 위로 서리는 그 속에서 그러나 나는 오늘 다시 깨닫는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따스한 믿음을 결코 포기할 수 없음을 얼굴을 씻고 가슴을 씻고 가슴에 묻은 사랑의 소금끼를 씻고 다시 사랑하기 위하여, 빼앗겼던 것을 씻듯이 내 가슴에 묻었던 그대의 얇은 가슴마저 씻으면서 근육에 배인 아픔만큼은 씻어내릴 수 없음을 다시 깨닫는다. 그것은 정말 ..

시(詩)와 詩魂 2020.08.16

'하물며'라는 말 /김승희

'하물며'라는 말 -김승희 하물며라는 말이여, 참으로 아름답도다, 그 말에는 슬픔 가득한 서광의 눈동자가 들어 있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다시 한번 돌아다보는 사랑이 들어 있다, 비천한 것들에 대한 굉장한 비탄이 들어 있다 사랑하지 않는 마음에는 하물며가 없다, 마음이 마음이 아닐 때 들려오는 말이여, 하물며라는 증오를 거부하는 말이여, 아무것도 아닌 네가 아무것도 아닌 나를 한 번 더 은은히 돌아보는 눈길 같은 말이여 한없는 바닥에서 굉장히 쟁쟁한 말이여

시(詩)와 詩魂 2020.08.16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이성복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 -아포리즘 -이성복 1. 허무―기형적인 감정. 잎파랑치를 표백시킨 감정. 허무를 실체로 여기는 자들의 심약성. 허무가 허무 자신을 간통하고 부정할 때까지 한 시대를 지탱해 주는 것은 재능이 아니라 힘이다. 2. 내가 `최신약(最新藥)'이라는 시험관 속에 신과 여러 종류의 인간군―전통주의자, 히피, 예술가 등―을 한꺼번에 집어넣고 배양해 본 결과, 신은 결코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인간들의 여러 주장은 서로 평행해서, 신의 살해에 공모할 만큼 이해타산이 맞지 않는다. 이들의 상이한 주장 때문에 신은 자살한 만한 궁지에 몰리지도 않는다. 신의 죽음 또한 일파(一派)의 주장이다. 인간은 신을 죽일 만한 플롯을 꾸밀 수도 없고, 그 플롯에 참여할 수도 없다. 3. 위증(僞證)의..

시(詩)와 詩魂 2020.08.16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 오규원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 오규원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 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만의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시(詩)와 詩魂 2020.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