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인기척/이병률

나뭇잎숨결 2020. 8. 2. 17:38

인기척

 

-이병률

 

 

한 오만 년쯤 걸어왔다며

내 앞에 우뚝 선 사람이 있다면 어쩔테냐.

그 사람 내 사람이 되어

한 만 년쯤 살자고 조른다면 어쩔테냐.

 

후닥닥 짐 싸들고

큰 산 밑으로 가 아웅다웅 살 테냐

소리소문 없이 만난 빈 손의 인연으로

실개천 가에 뿌연 쌀뜨물 흘리며

남 몰라라 살 테냐.

 

그렇게 살다,

그 사람이 걸어왔다는 오만 년이

오만 년 세월을 지켜온

지구의 나무와 무덤과 이파리와 별과

짐승의 꼬리로도 다 가릴 수 없는 넓이와 기럭지라면

 

그때 문득 죄지은 생각으로

오만 년을 거슬러

혼자 걸어갈 수 있겠느냐.

 

아침에 눈뜨자마자, 오만 개의 밥상을 차려

오만 년을 노래 부르고,

산 하나를 파내어

오만 개의 돌로 집을 짓자 애교 부리면

오만 년을 다 헤아려 빚을 갚겠느냐.

 

미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봄날,

마알간 얼굴을 들이밀면서

그늘지게 그늘지게 사랑하며 살자고

슬쩍슬쩍 건드려온다면 어쩔 테냐.

 

지친 오만 년 끝에 몸 풀어헤친

그 사람 인기척이 코앞인데

살겠느냐..

말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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