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척
-이병률
한 오만 년쯤 걸어왔다며
내 앞에 우뚝 선 사람이 있다면 어쩔테냐.
그 사람 내 사람이 되어
한 만 년쯤 살자고 조른다면 어쩔테냐.
후닥닥 짐 싸들고
큰 산 밑으로 가 아웅다웅 살 테냐
소리소문 없이 만난 빈 손의 인연으로
실개천 가에 뿌연 쌀뜨물 흘리며
남 몰라라 살 테냐.
그렇게 살다,
그 사람이 걸어왔다는 오만 년이
오만 년 세월을 지켜온
지구의 나무와 무덤과 이파리와 별과
짐승의 꼬리로도 다 가릴 수 없는 넓이와 기럭지라면
그때 문득 죄지은 생각으로
오만 년을 거슬러
혼자 걸어갈 수 있겠느냐.
아침에 눈뜨자마자, 오만 개의 밥상을 차려
오만 년을 노래 부르고,
산 하나를 파내어
오만 개의 돌로 집을 짓자 애교 부리면
오만 년을 다 헤아려 빚을 갚겠느냐.
미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봄날,
마알간 얼굴을 들이밀면서
그늘지게 그늘지게 사랑하며 살자고
슬쩍슬쩍 건드려온다면 어쩔 테냐.
지친 오만 년 끝에 몸 풀어헤친
그 사람 인기척이 코앞인데
살겠느냐..
말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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