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미의 진경 혹은 언어의 시적 전유 : 『처용단장』을 중심으로

나뭇잎숨결 2020. 6. 10. 08:46

 

미의 진경 혹은 언어의 시적 전유

-『처용단장』을 중심으로

 

 

김석준

 

-문인은 세계의 적이다- 보들레르, 「발가벗겨진 나의 마음」중, 『악의 꽃』

 

 

1. 처용은 기표다 : 언어미학의 존재적 층위

 

미가 헤겔의 이념과 칸트의 순수한 형식 사이를 종주하는 운동일 때, 이 미의 운동을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 양자의 변주 통일 속에 미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대극점으로의 휨 작용이 미의 극한값인가. 사실 미의 정체를 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미 그 자체를 무엇으로 인지하는가.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 미일 때, 그 미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떠한 형상으로 드러나는가. 또 미가 형식의 다양한 변주 위에 핀 개별자들의 특수자로의 고양일 때, 그 미를 어떤 방식으로 인지 포착하는가. 미의 운동은 미궁이다. 아니 미란 이념의 바깥이자 형식이 아닌 곳으로 휘어진 극한의 운동인데, 그것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이나 말할 수 없는 것에의 욕망하는 의식의 굴절점이다. 미의 앞면이 늘 형식으로 휘어진 순간, 미의 뒷면은 항상 내용으로 뒤를 메운다. 그것은 역으로 미란 형식도 아니고 이념도 아니라는 사실을 성립시킨다. 엄밀한 의미로 볼 때 미란 형식의 추동력 위에 자리한 내용의 엔트로피이거나 그 역을 성립시키는 마법의 순간이다. 만약에 미의 보편적인 운동이 이와 같지 않다면, 미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그것은 역으로 미의 운동이 동일률을 이반시키는 부정성의 운동이거나 결코 동일률로 환원되지 않는 이중의 부정적 운동이라는 말과 같다. 따라서 부정의 부정은 긍정으로 수렴하는 동일성의 운동이 아니라, 전혀 다른 질적 변이의 순간, 즉 새로운 미가 개현되는 존재론적 전회의 순간이다.

 

미의 이러한 존재론적 정체성 위에 우리는 김춘수가 처한 시말의 위치를 조명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하겠다. 왜냐하면 김춘수의 시들은 가장 독특하게 진화한 하나의 미적 진경이기 때문이다. 김춘수의 그것은 질풍노도와도 같은 역사의 굴절면 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유유히 굽이치면서 생성된 하나의 기이한 시적 사태이자, 시말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독특한 전형 중의 하나이다. 만약에 모든 예술의 역사가 시대정신과의 상호 길항작용을 통해서 생성된 것이라 할 때, 혹은 앞에서 고동치는 역사적 현장성에 관한 미래적 전언 속에 시말이 위치한다 할 때, 김춘수의 시말운동은 어쩌면 가장 이질성을 띤 미적 형식이거나 하나의 변종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것은 역으로 김춘수의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품들이 시대의 바깥, 즉 시대성과 무관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김춘수의 시말운동은 시대이념의 대타존재이거나 순수한 미적 탐구로 휘어진 언어의 시적 전유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불행한 시대에 언어의 미적 전유로만 일관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비록 김춘수의 그것이 전일한 미에의 향일성으로 휘어진 유미주의일 때조차, 우리는 역사의 후면경에 위치한 그의 시말을 어떻게 평가하여야만 하는가. 사실 이 문제가 김춘수의 시학이 위치하는 자리이자, 가장 요긴한 언급되어야한 할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김춘수의 문학적 정체성이 24-5년에 걸쳐 총체적으로 노정된 『처용단장』에 대한 평가에서 비롯한다고 할 때, 혹은 역사성과 시대담론과 교묘하게 결탁한 시의 문학사적 관점에서 볼 때, 『처용단장』의 시적 위치는 가장 중차대한 사안이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김춘수의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미적 원리를 선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극한까지 도달한 미의 진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용단장』의 시적 위의는 여타의 다양한 문학적 이즘들이 횡행했던 196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의 시적 실천들의 바깥에 위치한 전무후무한 시사적 사건이자, 초지일관 언어의 미적 전유를 추구한 김춘수의 고유한 시적 페르조나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25년에 걸쳐 『현대시학』과 『현대문학』연재한 후 미학사에서 상재된 『처용단장』의 언어미학적 위치는 미의 절

대성을 향한 전일한 의식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지고한 노력의 성과물이다. 설령 김춘수의 그것이 시대담론이나 권력담론의 타자로 위치할 때조차, 따라서 소수의 문학권력들이 김춘수가 행한 일련의 시적 작업을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할 때조차, 김춘수의 시말운동은 올연히 살아남아 담론의 담론, 즉 메타담론으로 위치하게 된다. 이를테면 미셸 푸코가 『담론의 질서』나 여타의 저서에서 말한 타자성의 원리처럼, 배제되고 소외된 타자는 권력담론의 역설적인 작용에 의해 중심담론으로 위치하게 된다. 그것은 소외된 정신이 자기의식에 도달하는 변증법적 과정처럼, 그러한 담론적 운명은 『처용단장』의 문학사적인 운명이자 “처용”이 처한 미의 역설적인 운명이다. 시대 이데올로기의 타자는 시의 역사의 주인공이다. 소외된 타자가 의식의 혁명을 추동하듯이, 『처용단장』이 추동한 시말은 소외된 정신이 창조한 시말혁명이자 권력담론의 조정력을 무화시키는 가장 역동적인 미의 진경이다.

 

그러므로 『처용단장』의 시적 탐구는 김춘수가 행한 일련의 시론, 즉 무의미시, 허무, 유희, 자유 등등의 이론적 수사적 전략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아니 역으로 김춘수가 감행한 일련의 시론적 시도는 권력담론의 타자가 행할 수 있는 자구책이자 방법적 전략이지만, 이제 우리는 시인이 행한 시의 이해의 통로 역할을 했던 무수히 많은 일련의 시론적 작업을 무로 되돌려보내야만 한다. 왜냐하면 김춘수 시를 해명하는데, 김춘수의 시론들은 하나의 구멍이자 함정인 동시에 시의 이해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춘수 하면 늘 회자되는 무의미시, 허무 등등의 시에 관한 접두어를 문학사에서 추방하고, 혹은 이제까지 연구된 김춘수에 관한 연구작업을 무로 되돌려버리고, 25년에 걸쳐 창작된 『처용단장』에 언표된 시에 관한 의식이 변이 되는 과정이나 언어미학이 변해가는 총체적인 과정을 탐구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처용단장』에 언표된 “처용”을 의미나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운 하나의 기표로 명명함으로써 무의미에 고착된 김춘수의 시말길을 열어 젖혀 새로운 문학적 전기를 마련하는 것은 의미있다 하겠다. 왜냐하면 『처용단장』은 “처용”이라는 어휘가 단 한번도 언급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처용설화와 무관한 것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김춘수에게 처용은 라캉 식으로 말해서 대문자 S로 존재하는 기표이거나 시말이 발원하는 존재론적 심급이다. 이를테면 대문자 S로 작용하는 처용은 존재의 시학에서 언어 미학으로의 전이가 일어나는 결절점이자 일종의 언어의 언어, 즉 메타언어이다. 이 얼마나 멋진 순간인가. 권력담론의 타자로 존재하는 김춘수에게 처용은 콜럼버스의 신대륙의 발견이자, 존재론적 전회가 일어나는 가장 극적인 순간이다. 왜냐하면 프레게가 고민했던 언어의 지시능력을 일거에 무너트리면서 말-자유를 극적으로 실현했기 때문이다. 처용의 심급 아래 말해진 말들은 모두 시말이다. 설령 처용이 펼쳐내는 말의 역동적인 운동이 파자놀이에 가까운 그 무엇으로 수렴하는 순간에도, 말은 의미나 대상으로부터 무한히 자유로운 까닭에 말-한계를 가볍게 돌파하게 된다. 따라서 처용은 말-사태의 총합이자, 말해질 수 있는 모든 말이다. 역으로 말이 있는 곳에 처용이 있고, 말할 수 없는 말-너머에도 처용이 있다.

 

그러므로 『처용단장』은 다음의 등식을 성립시킨다. ‘처용S=말해진 말+말할 수 없는 말’이다라는 기묘한 언어미학을 성립시키면서, 말이 언표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하게 된다. 더 나아가 처용 S는 말의 무의식적 심연이거나 말의 상징계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말이 은밀하게 숨어있는 시말의 저장고이자 시말이 생성될 수 있는 가능적 근거이기 때문이다. 김춘수가 의식했건 의식하지 못했건 상관없이, 처용 S가 행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말 그 자체의 절대값을 향한 순정한 미의 추구이거나 이제까지 형성된 미적 관행을 일탈함으로써 생성된 새로운 미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김춘수의 시적 작업들을 평가함에 있어 유의해야할 점은 말-함수의 극한값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인지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언어가 조어해내는 미의 절대값이다. 의미로부터 자유롭고 역사로부터도 자유로운 시말은 언어가 발산하는 순수한 체취나 향기를 미의 간접화법으로 치환시켜 미의 제국, 즉 유미주의로 귀환하게 된다. 그것은 역으로 미가 존재하는 곳에서 언어가 시말을 도발하게 되며, 언어가 시말로 치환되는 곳에 심미적 이성이 존재한다는 말과 같다.

 

 

 

2. 시말의 존재론적 전회 : 존재에서 언어 그 자체로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렇게 읊조렸을 것이리라, ‘고여 있으면 썩는다. 언어도 썩고 사유도 썩어 더 이상 신선한 시말을 생산할 수 없다.’ 물론 하나의 형식, 하나의 이즘 내부에 안주하여 초지일관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그것만큼 편안한 시살이가 없다. 그러나 요졸해야 한다. 아니 요졸이 아니면 예술의 세계에서 초지일관이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시인에게 언어는 불문율이자 접근이 불가능한 하나의 幻이라는 사실이다. 시말에 대한 열정으로 울혈이 가슴에 가득하다. 이렇게 시도해보아도 답답하고, 저렇게 언어를 치환시켜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시인이란 언어에 갇힌 자이다. 언어에 갇혀 옴짝달싹한 채 뜬눈으로 밤을 포로가 된 자가 바로 시인이다. 밤을 수도 없이 지새우면서 뮤즈의 전당에 노크도 해본다. 역시 침묵이다. 무병을 앓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자고로 시인이란 영매와 같은 부류의 인간형이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시적 페르조나를 변이시킨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과업이다. 각고의 노력이 없이는 결코 새로운 시말이 개현되지 않는다.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삶-시간-세계가 만들어낸 고통의 지대를 언어로 순치시키는 고행의 길이다. 세계와 언어 사이의 미적 거리를 내용과 형식으로 건너면서 시말의 질감이나 무게감을 순백의 정신성으로 채색한 순간에만 독이적인 양식을 창조하게 된다.

 

존재의 언어에서 언어 그 자체의 문양 쪽으로 시말의 존재론적 전회를 이룩한 김춘수의 삶도 그와 같았으리라. 아니 언어 그 자체와 씨름 하는 시인이란 시지포스다. 하이데거에게 언어가 존재의 집이듯이, 김춘수에게 언어는 시인의 운명이 걸린 존재의 짐이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그렇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의 전회가 그렇듯, 시말의 존재론적 전회의 순간은 시인의 삶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삶도 걸고 죽음도 걸어본다. 걸 수 있는 것은 모두 걸어야만 시말이 되고 진정한 시인이 된다. 이제 말의 진법이 보인다. 이렇게 해도 시말이 되고, 저렇게 해도 시말이 현시된다. 세상에 시말이 아닌 것이 없다. 존재에서 언어에로의 전회는 말에 관한 눈트임이자, 말의 영매가 되는 순간인데, 그 무병 들린 말이 바로 김춘수의 시말이다. 따라서 시인은 말의 영매이다. 어쩌면 김춘수는 존재와 언어 사이에서 수없이 방황했음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존재에서 언어 그 자체로의 전회는 말에 관한 돈오의 순간을 점수법으로 승화시킨, 미의 절대적 형식이다. 왜냐하면 김춘수가 지향한 언어미학은 말해진 말이 말-논리를 벗어나 말-자유를 실현시키는 동시에 말-한계 너머로 비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해진 말은 말이 아닌 말로 휘어져 말-의미를 초월하게 된다. 이제 말은 의미도 아니고, 대상도 아니다. 말은 그저 말이다. 김춘수가 행한 존재에서 언어에로의 전회의 최종목적은 바로 이 지점이 아니었을까. 물론 말이 말을 물고가 말 유희를 감행하게 될 때, 말은 말 내부에서 가볍게 기화되어 소진되겠지만, 말은 더 이상 지시에 구애를 받지 않아도 된다. 말은 곧 자유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꽃」전문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로빈슨 크루소처럼 혼자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존재와 존재 사이를 매개 소통시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부를 때 이 양자 사이에 무엇이 가로놓여있는가. 왜 존재는 존재와 더불어 존재할 때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는가. “그”와 “너”와 “나” 사이에 진정 무엇이 흐르는가. 인간애인가, 인륜적 사랑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의미의 존재감인가. 김춘수의 「꽃」은 시인이 지향했던 존재의 문제에 관한 의미론적 층위를 총체적으로 노정한 대표작인데, 시인은 이 시를 통해서 존재의 어떤 면모를 육화시켰는가. 대저 삶-시간-세계 내부를 활보하는 존재란 무엇이며, 또 존재란 말은 무엇을 지칭하는가. 시 「꽃」이 “이름”과 “몸짓”과 “눈짓” 사이를 “꽃”이라는 상징적 존재물을 매개로 존재의 의미를 탐구해 들어갈 때 존재의 어떤 면모를 육화시켰는가. 문제는 미지의 “그”에 대한 “나”의 앎에의 의지이거나 “그”에 관한 존재론적 의미부여에 있다. 시인에게 존재란 미지의 “그”가 기지의 “너”로 불러진 순간에 의미의 존재로 탈바꿈하게 된다.

 

따라서 존재의 문제는 “이름” 내부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존재의 존재성은 이름으로 확인된다. 그렇다면 이름은 무엇인가. 이름으로 불러지기를 기다리는 미지의 소박한 “몸짓”을 통해서 시인은 어떤 존재론적 국면을 읽어냈는가. 존재 사이의 교감이다. 다시 말해서 상호타자성으로 존재하던 “그”가 나의 너가 되고 너의 너로 이름 불러진 순간, 존재는 의미의 존재로 탈바꿈하게 된다. 따라서 문제는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문제는 “우리들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로 의미의 중심축을 변이시켜 존재의 존재성을 질적 변환시킨다. 김춘수에게 존재란 “우리”다. “우리”는 “하나의 몸짓”이 “하나의 눈짓”으로 변이된 순간에 생성되는 인륜적 공감대이다. 마치 마르틴 부버가 『나와 너』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부르다가 끝내는 짝말 나-너로 합일이 되어 완전한 우리로 승화되는 바로 그 지점에 존재의 참모습이 있다. 따라서 나-너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다. 김춘수에게 존재란 타자로 존재하는 “그”를 상호타자성인 나-너의 친밀한 관계로 포월하여 대승적인 “우리”로 고양되는 가장 온전한 자기됨으로의 휨 작용이다.

 

벽壁이 걸어오고 있었다.

늙은 홰나무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밤에 눈을 뜨고 보면

호주 선교사네 집

회랑의 벽에 걸린 청동시계가

겨울도 다 갔는데

검고 긴 망토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내 곁에는

바다가 잠을 자고 있었다.

잠자는 바다를 보면

바다는 또 제 품에

숭어새끼를 한 마리 잠재우고 있었다.

 

다시 또 잠을 자기 위하여 나는

검고 긴

한밤의 망토 속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바다를 품에 안고

한 마리 숭어새끼와 함께 나는

다시 또 잠이 들곤 하였다.

 

*

 

호주 선교사네 집에는

호주에서 가지고 온 해와 바람이

따로 또 있었다.

탱자나무 울 사이로

겨울에 죽도화가 피어 있었다.

주님 생일날 밤에는

눈이 내리고

내 눈썹과 눈썹 사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나비가 날고 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제1부「눈, 바다, 山茶花 3」,『처용단장』

 

김춘수에게 『처용단장』은 존재론적 전회가 일어나는 시말혁명의 주체다. 릴케의 영향을 받은 처용이전의 시말들은 존재에서 시작해서 존재로 귀결하는 존재의 언어이다. 존재의 언어는 의미의 언어이고 대상에 관한 언어이다. 존재의 언어는 ‘-관한’이라는 지시관계 위에서만 성립하게 된다. 따라서 존재의 언어는 묶인 언어이자 자유를 망각한 언어이다. 따라서 존재에 묶인 말들의 탈출구는 존재의 바깥으로 탈주하는 것이 아니라, 말 내부에 칩거하는데 있다. 한국시사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비견될 만큼 시말의 획기적인 변화를 이룩한 『처용단장』은 정지용이 지향했던 즉물적 언어와는 차원이 다른 말의 진경, 즉 말-자유를 실현한 최초의 작품집이다.

 

위에 인용한 시 「눈, 바다, 산다화山茶花 3」은 『처용단장』이 지향하는 언어의식이 총체적으로 노정된 작품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요즘 유행하는 신세대들의 시들과 어조나 시적 구성이 별반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새로움을 지향하는 시들이 이상이나 김춘수의 시적 자장 바깥으로 탈주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말과 같다. 이상의 그것이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무의식의 심연에 자율권을 부여했다면, 김춘수의 그것은 언어 그 자체가 조어해낼 수 있는 말-자유를 실현했다 하겠다. 따라서 이상의 미적 자율성보다 김춘수의 시말운동이 보다 더 극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김춘수는 언어가 가진 미적 효과에 온 신경을 집중시킨 최초 시인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상상의 공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시말로 변이시키면서, 말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입체화시킨다. 마치 “벽이 걸어오고”, “홰나무가 걸어오고” 끝내는 “청도시계”가 “걸어오는” 진기한 풍경을 연출하면서, 시인은 대상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코드변환시킨다. 그것은 의미 진술의 소통방식이 아니라, 의미 왜곡이자 의미의 전도이다. 김춘수에게서 비롯한 이러한 표현법은 은유도 아니고 환유도 아니다. 그것은 말이 표현할 수 방법적인 통념의 전복이다.

 

마치 보들레르가 문인은 세계의 적이라고 인식했던 것처럼, 김춘수는 자신의 이전에 사용되었던 시말운동의 공공의 적이다. 25년에 걸쳐 창작된 『처용단장』에 형상된 미적 자의식은 이데올로기적 민중의식을 표방한 집단이나 전위성을 표방하는 소수 문학권력 집단의 대타존재이거나 그들이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식의 극한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적이자 동지이기도 한 김춘수의 25년에 걸친 시말운동은 담론의 타자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면서 언어를 언어에게 되돌려주는 기묘한 역설을 연출하고 있다. 이를테면 김춘수의 말들은 소쉬르의 언어관이나 프레게의 지시문제를 철저하게 위반하면서 말의 신화적 상태로 되돌려놓고 있다. 『처용단장』은 로고스중심주의를 비난한 데리다의 해체론도 아니다. 폴 드만의 수사학도 아니다. 김춘수의 그것은 절대 언어이다. 이때 이 절대라는 수식은 의미의 절대성이 아니라, 의미로부터 무한히 자유로운 따라서 의미를 시말 내부에서 쫓아낸 절대다. 그렇다고 그것이 무의미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3. 언어의 미적 자율성 혹은 지시의 부정

 

김춘수에 도달해서 말은 더 이상 의미와 지시 대상의 현전성으로 휘어지지 않아도 된다. 왜 그렇게도 시인은 언어 내부에서 의미를 고사시켜야만 했을까. 도대체 존재에서 언어에로의 전회가 도달하는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의미를 무의미로 해소한 순간, 의미는 진짜 무의미로 괴사했는가. 어쩌면 김춘수도 데리다가 빠졌던 함정의 지점에 똑같이 앉아 골머리가 썩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유미주의적 언어지상주의가 직면한 딜레마이자, 『처용단장』이 안고 갈 천형적 운명이다. 다시 말해서 김춘수가 행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A=B, A=A, A≠B, A≠A 등등의 등식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언어관계의 부정 위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처용단장』에 언표된 시말운동이 언어의 지시적 기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언어를 서술하는 것이 언어로 재귀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언어는 의미로부터 무한히 자유로운 까닭에 말해질 수 있는 말을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 언어는 의미가 사상된 대문자 S라는 기표이다. 마치 『처용단장』이 처용 S로부터 언어를 도발시키듯이, 시인의 시말운동은 기표에서 기표로 전이되는 말의 운동이다. 그렇다고 김춘수의 그것이 데리다의 차연이나 라캉의 기표-기의 관계를 의미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김춘수에게 있어서 처용 S는 언어가 존재하는 절대적 심급이거나 말-자유의 임계점이다. 따라서 처용 S는 말해질 수 있는 말뿐만 아니라, 말해질 수 없는 말을 말하게 만드는 가능적 실재이다. 그것은 역으로 처용 S가 무한히 자유롭다는 말과 같다.

 

ㅕㄱㅅㅏㄴㅡㄴ

눈썹이없는아이가눈썹이없는아이를울린다.

역사를

심판해야한다 ㅣㄴㄱㅏㄴl

심판해야한다고 니콜라이 베르쟈에프는

이데올로기의솜사탕이다

바보야

하늘수박은올리브빛이다바보야 제2부「들리는 소리 39」중 『처용단장』

 

그렇다면 우리는 김춘수의 시말운동이 왜 언어를 무한히 자유롭게 만들면서 유미주의, 즉 언어지상주의로 경도되었는지를 물어야만 한다. 이 물음은 시인 김춘수에게도 해당되기는 하지만, 자연인 김춘수에게 더 해당되는 사항이다. 말하자면 언어에 대한 탐미주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인의 시에 관한 철학은 역으로 역사에 대한 개인적 신념에서 비롯한다고 보여진다. 무릇 “역사를/심판해야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닌 시인은 역사를 파자놀이하고 “바보야”를 연발하면서, 역사의 어떤 진면목을 본 것인가. 좌파 이념의 환멸인가, 문학의 권력의 기만성인가. 둘 모두이다. 시인이 역사를 우롱하고 역사의 타자로 선 순간, 혹은 니콜라이 베르쟈에프의 입을 통해서 “이데올로기의솜사탕”을 이야기한 순간, 김춘수에게 시대상이나 시대이념은 예술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시인에게 역사는 그저 “어쩌나”이거나 “ㅣ 바보야,/역사가 ㅕㄱㅅㅏㄱㅏ하면서/ㅣ ㅂㅏㅂㅗㅑ”에 언표 된 것처럼 무의미한 파자놀이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인에게 언어란 그 자체로 그 어떤 무엇에도 오염되지 않은 가장 순결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춘수에게 언어란 절대다. 설령 그것이 유희나 허무로 휘어진 순간에도 언어는 이데올로기로 가장한 역사적 이념의 타자이다. 그것은 역으로 시말이 위치하는 초역사적 성격이기도 한데, 김춘수의 시말운동은 언어에 의한 언어를 위한 언어 그 자체의 운동이다. 이상의 그것이 의식의 심연으로 휘어진 언어적 실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반면에, 김춘수의 그것은 언어의 심연, 즉 언어가 펼쳐낼 수 있는 그 모든 것들 실험하면서 언어를 언어에게 되돌려주는 일종의 언어의 마법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역사의 저편에 위치하면서 권력담론의 타자 편에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김춘수에게 『처용단장』으로의 시적 귀결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물론 이데올로기나 역사적 시대 이념에서 볼 때, 김춘수의 그것이 퇴폐적이라고 공공의 적으로 지목될 수도 있지만, 시인이 행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적 원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하겠다.

 

 

불러다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말더듬이 일자무식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불러다오.

멕시코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 제2부「들리는 소리5」『처용단장』

 

서시를 포함해 총 9편으로 구성된 제 2부「들리는 소리」연작은 언어가 가지는 음악성에 주목하고 있다. 원래 시는 음악이다. 원래 시는 문어가 아니라 구어다. 그런데 김춘수는 위의 인용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소리”에 시말 전체를 응고시킨다. 처용 S는 “들리는 소리”, 즉 언어의 반복이 만든 리듬감 속에 시말운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그것은 의미를 반복적 리듬으로 지우는 행위이자, 언어 내부에 간직된 고유한 음가를 되살리는 하나의 음성상징이다. 이를테면 처용 S는 씌어진 기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파롤이든 랑그이든 상관없이, 언어가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효과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제2부 들리는 소리」연작 전체는 말-의미를 소리로 상쇄하면서 시를 말로 치환시킨다. 처용 S는 음악이다. 처용 S는 샤먼의 주술이다. 마치 하늘과 땅을 매개 소통시키는 샤먼의 읊조림이 시말의 원형이었듯이, 김춘수는 시와 말이 일치된 엄밀한 의미의 시말을 처용 S 내부에 응고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바다”는 시인이 체현하고 싶은 시말운동의 언어적 분신이자, 일종의 언어적 주술이기도 한데, 그것은 의미의 기호가 아니라, 의미의 이전단계이거나 의미가 완전히 소진된 음성상징이다. 따라서 사바다는 처용 S의 언어적 대리표상이고, 처용 S는 사바다를 통해서 언어가 존재하는 방식, 즉 언어가 구현할 수 있는 미적 자율성을 완전하게 체현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김춘수에게 있어서 사바다는 상상계적 소타자가 만들어낼 수 있는 언어적 상상력의 미적 성과물인데, 그것은 말해진 말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말의 창조적 국면, 즉 시말의 정초에 해당하는 말의 신기원이다. 그러므로 사바다는 대문자 S처럼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으면서 모든 말들을 수용하는 거대한 언어의 저장고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김춘수의 『처용단장』이 전개하는 시말운동은 사바다라는 자유로운 언어 기호 위에서 언어의 제국을 건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으로 사바다가 김춘수가 지향하는 유미주의적 언어 미학의 정점이라는 말을 성립시킨다.

 

①은종이의 천사는

울고 있었다.

누가 코밑 수염을 달아주었기 때문이다.

제가 우는 눈물의 무게로

한쪽 어깨가 조금 기울고 있었다.

조금 기운 천사의

어깨 너머로

얼룩암소가 아이를 낳고 있었다.

아이를 낳으면서

얼룩암소도 새벽까지 울고 있었다.

그해 겨울은 눈이

그 언저리에만 오고 있었다. 제1부「눈, 바다, 산다화山茶花 10」,『처용단장』

 

②모든 것이

전쟁까지가

모난 괄호 안에 들어가고 있었다.

「마르크스」와 「자본론」까지가,

30년대도 다 저물어가면서

나에게 때 아닌 세기말이 와서

나는 그때

밤잠을 설치며

쉐스토프를 읽고 있었다.

                                           -「허무로부터의 창조」, 제3부「메아리 20」중,『처용단장』

 

줄글로띄어쓰기와구두점을무시하고동사를명사보다앞에놓고잭슨〮•폴록을앞질러포스트모더니즘으로존•케이시를앞질러소리내지않는악기처럼미국의한병사가갖다준쓸개한쪽서럽고서서럽던

 

서기 1945년 8월 15일. 제3부「메아리 28」,『처용단장』

 

25년에 걸쳐 창작된 『처용단장』은 처용 S가 펼쳐내는 언어들의 천국이다. 총4부로 구성된 처용 S의 심급 아래 말 전체를 환유적 관계로 추동하고 있다. 부와 부 사이의 언어적 관계도 환유고, 부와 단장 사이 그리고 부 내부의 단장과 단장 사이도 환유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단장 내부를 이끌어가는 언어의 구조이다. 역시 환유다. 그것은 의미의 추동이 아니라 말의 추동이다. 말과 말 사이가 은유적 관계가 아니라 환유적으로 표상될 때, 의미는 말 내부로 잠입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말과 말 사이사이로 빠져나가거나 애초부터 의미의 부재상태로 이끌어가게 된다. 이를테면 ①은 그러한 경우의 적확한 예인데, 문장과 문장 사이는 인과필연으로 이끌어지지 않는데, 그것은 이미지의 이동점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다시 말해서 이미지의 변환이 의미의 변환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를 불연속으로 이끌어 의미관계 자체를 애초부터 불가능하게 만든다. ‘은종이의 천사의 울음->코밑 수염->얼룩암소->눈’으로 이행 변해가는 일련의 이미지들은 처용 S가 만들어낸 말들이거나 그 심연에 가라앉은 말이다. 따라서 이미지의 이동점은 의미의 이동점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1부의 제목인 “눈, 바다, 산다화山茶花”로 회귀하는 운동은 더더욱 아니다. 왜냐하면 『처용단장』 전체가 바로 삶-시간-세계와도 환유적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김춘수의 이러한 시말운동을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만 하는가. 무릇 김춘수는 이러한 시말들의 제의를 통해서 어떤 시적 효과를 노린 것인가. 시인은 그것을 무의미시라고 말하지만, 엄밀한 의미의 무의미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김춘수의 그것은 의미나 지시 관계에 갇힌 말들을 의미나 지시적 관계 바깥으로 추동하는 언어 자체의 운동이거나 의미의 수인으로부터 자유를 구가하는 말들의 순정한 제의일지도 모른다. 역으로 이러한 시말운동은 말의 원상을 되비추는 언어미학의 진경이자, 말이 의미이라는 외연을 벗어던지게 되는 최초의 계기에 다름 아니다.

 

②는 시인의 창조적 지평을 엿볼 수 있는 시인데, 그것은 “괄호”와 “허무”라는 말에 모든 것이 응고되어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괄호”와 “허무”라는 미지의 공간이나 의식의 지대에서 처용 S라는 메타언어를 창조적으로 사유하는가. 아니 우리는 김춘수에게 창조란 무엇이며 어떤 것을 일러 진정한 창조적 지평인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허무다. 이때 허무는 시말의 제로지대, 즉 폐허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꿈을 잃은 식민지의 젊은이” 시절과 “전쟁”을 체험한 세대에게 시적 허무란 무엇이며 또 그 허무를 통해서 어떤 새로운 시말을 창조하기를 염원하는가. 말-자유다. 그런데 이 말-자유라는 미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보조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괄호”다. 시인에게 “괄호”는 말의 원점으로 회귀하기 위한 선험적 가정이거나 처용 S가 작동하는 인식의 공간이다. 이를테면 괄호는 “모든 것”이 키질되어 걸러지는 시말에 관한 인식의 그물이다. 괄호의 바깥과 안쪽은 상호 환유관계이다. 바깥이 삶-시간-세계의 총체적인 면모라면, 그 안쪽은 삶-시간-세계가 시말화 되는 말의 변곡점이다. 따라서 괄호의 안쪽은 의미도 없고, 역사도 없다. 모든 것이 괄호의 안쪽으로 들어간 순간, 처용 S가 판단을 중지하기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의미이든 무의미이든, 혹은 은유이든 환유이든 상관없이, 모든 말들은 처용 S의 심급 밑으로 가라앉아 있다가 다실 시말로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춘수에게 허무란 완전한 무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중지를 요구하는 괄호의 지대에서 시말이 생성되는 예비단계이다. 역으로 말들은 허무의 심연을 통과한 연후에 시말로 재탄생하게 된다.

 

③은 처용 S가 작동하는 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지시적 관계를 정립하는 기호론적 세미오시스와 미정형의 기호적 질료들이 산적해있는 쌩볼릭 사이에 존재하는 세미오틱 코라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처용 S는 언어 기호가 발생하는 잠재적 가능태이자, 언어의 통사구조가 정립되기도 하고 “무시”되기도 하는 시말의 존재론적 심연이다. 그런데 김춘수는 의미화를 지향하는 통사구조나 의미론의 정립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의 시말들은 해체론적이다. 처용 S가 환유적인 시말을 지향하는 한, 혹은 은유나 지시 관계로부터의 족쇄를 풀고 말-자유를 열망하는 한,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적 원리를 구현하게 된다. 이를테면 김춘수의 시적 원리는 “줄글로띄어쓰기와구두점을무시하고동사를명사보다앞에놓”는 통사구조를 파괴하는데 있다. 마치 제3부 「메아리1」에 언표된 “,표나 .표가 먼저 오는 수도 있다”나 “,誤. 讀”처럼, 시인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향하는 해체론적 경향을 충실하게 실현하면서, 언어 그 자체의 향기나 언어가 산출하는 미묘한 분위기를 탐닉하게 된다. 맞다. 분명 대여의 『처용단장』은 처용 S라는 언어의 심급 내부에서 언어 그 자체를 향유하고 있는데, 그것은 언어 그 자체의 전복적 의지의 실현이거나 의미관계의 전도에 있다. 마치 민족 해방일인 “서기 1945년 8월 15일”을 “서럽고서럽던” 날로 전도 전복시키듯이 김춘수의 시적 사명은 의미의 전복이나 해체를 통해 말-자유의 실현에 있다 하겠다.

 

릴케의 그 천사가

자음과 모음

서너 개의 음절로 왠지 느닷없이

분해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제3부「메아리 42」중,『처용단장』

 

4. 시란 무엇인가 : 장식품 혹은 역사의 바깥

 

인간에게 시란 무엇인가. 아니 우리에겐 진짜 모범이 될 시적 스승이나 정전이 될만한 시사적 인물이 존재하는가. 없다. 없다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편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놓치고 현재에 당도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파벌이고 섹터다. 그런데 대여 김춘수에겐 그런 역사가 없다. 그래서 그에겐 당연히 파벌이 없고 섹터가 없다. 그에겐 말만 있고 말에 관한 역사가 없으므로 말 앞에 무한히 자유로웠다. 그런데 그 말이 쉽지가 않다. 엄밀히 말해서 김춘수의 『처용단장』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오르테가 이 가제트나 엘리어트 공히 현대 문화 속의 시인이 ‘난해해야만’ 한다는 것을 타당하게 여기고 있을 때, 우리는 시에서 무엇을 느끼고 배우며 또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가. 현대의 시인들에게 난해성이 필연이라면, 그 난해한 문학적 코드를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만 하는가.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시가 서정으로 회귀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신세대 시인들 중에 김춘수의 아류들이 많다는 점이다. 아니 사설은 각설하고, 우리는 김춘수가 빚어놓은 말-사태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또 그것이 가지는 시적 위의를 어떻게 가름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시란 무엇인가와 직결하는 문제이기도 한데, 우리는 시를 통해서 무엇을 사유하고 어떤 공통감을 가지는가.

 

네 꿈을 훔쳐보지 못하고, 나는

무정부주의자도 되지 못하고

모난 괄호

거기서는 그런대로 제법

소리도 질러보고

부러지지 않고

달팽이뿔도 세워보고,

 

역사는 나를 비켜가라,

아니 맷돌처럼 단숨에

나를 으깨고 간다,

 

신미 4월 초이레

지금은 자시, 「제4부 뱀의 발 18」『처용단장』

 

위의 시는 『처용단장』의 맨 마지막 위치한 시이자, 시인의 시에 관한 철학을 담아낸 에필로그이다. “지금”이라고 언표된 “신미 4월 초이레”와 “역사” 사이에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가. 김춘수가 역사의 저편에 서서 “괄호” 내부에서 언어미학적 자유를 만끽할 때, 그것은 진정한 자유인가. 우리는 저 지고하다고 믿어질 수 있는 미를 위하여 역사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사람의 아들은 시대의 아들이다. 사람의 아들은 시대와 피부호흡하면서 자기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시인이 당당하게 “역사는 나를 비켜가라”고 외칠 때, 역사는 비껴가며 우리는 또 그 지엄한 역사 앞에 초연할 수 있는가. 역으로 역사의 타자로 선 자만이 미적 주체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미적 절대성과 역사는 절대로 조우가 불가능한 반대편인가. 김춘수의 논리대로라면 미란 역사의 저편에서 움터오는 그 무엇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미란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표상되는 것이 아닌가. 미가 생성이 되는 조건이 항상 시대함수와의 제로섬게임이라고 느껴질 때조차도 미란 시대성 앞에 초연할 수 있는가.

 

시간 앞에 선 모든 것들은 역사를 비껴갈 수 없다. 설령 김춘수의 『처용단장』이 육화시킨 처용 S의 시말운동이 역사를 조롱하고 경멸했더라도, 그것 역시 시의 역사 속에 남을 말들이 아닌가. 따라서 역사 바깥으로 탈주해도 역사적이고, 역사 내부에 안주해도 역사다. 그것은 김춘수가 역사의 바깥에서 역사를 좌망했다는 역설을 성립시키는 것은 아닌지. 권력담론과 역사적 이념의 바깥에서 시의 역사가 어떻게 씌어질지 김춘수는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아니 역으로 김춘수는 역사를 비껴간 유미주의적(혹은 탐미주의적) 언어미학으로의 일탈로 인해 시문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남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으리라. 마치 그가 빈번하게 평설한 무의미시로 대변되는 『처용단장』이 역사의 “맷돌처럼 단숨에” 시인 김춘수를 “으깨”어 역사 속에 그의 이름 색인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역사의 바깥에 선 언어의 마술사도 종국에는 역사 속에 편입되기 역사로 서술되기 때문이다.

 

 

동체胴體에서 떨어져 나간 새의 날개가

보이지 않는 어둠을 혼자서 날고

한 사나이의 무거운 발자국이 지구를 밟고 갈 때

허물어진 세계의 안쪽에서 우는

가을 벌레를 말하라.

아니

바다의 순결했던 부분을 말하고

베꼬니아의 꽃잎에 듣는

아침 햇살을 말하라.

아니

그을음과 굴뚝을 말하고

겨울 습기와

한강변의 두더지를 말하라.

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새의 날개가

보이지 않는 어둠을 혼자서 날고

한 사나이의 무거운 발자국이

지구를 밟고 갈 때, 「시1」전문, 『타령조 . 기타』

 

역사의 바깥이면 어떻게 역사의 안이면 어떤가. 김춘수가 분명 역사의 바깥에서 순수하게 언어미학을 추구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그 역사의 바깥에서 그가 어떤 시말을 예인했는가가 관건이다. 분명 말하건대 처용 S를 육화시킨 『처용단장』의 시말운동은 랑그가 아닌 파롤이다. 따라서 김춘수에게 시란 말이다. 처용이 역신을 물리치기 위해 넋두리하듯이, 타령조로 읊조리는 것이 바로 시의 본질이다. 「시1」은 그러한 사례를 시에 관한 시의 형식으로 자세하게 예증하고 있다. 시인에게 시란 말하는 것이지 쓰는 것이 아니다. 말은 세상의 모든 말이다. 김춘수에게 말은 보아 알고 느껴 알고 끝내는 들어서 안 것이기는 하지만, 시인이란 “허물어진 세계의 안쪽에서 우는/가을 벌레”의 전언을 미적으로 승화시키는 자이다. 때론 “보이지 않는 어둠을 혼자서 날”아가면서, 때론 “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새의 날개”가 되어 절망의 심연을 헤매기도 하면서, 시인은 “무거운 발자국”을 남기는 자이다. 따라서 시란 씌어진 말이 아니라, 이미 말해진 말이거나 말해진 말을 재차 전도시켜 새로운 말을 예인하는데 있다. 그런데 김춘수는 이러한 존재론적 시에 관한 관념, 즉 존재의 시학을 언어의 시학으로 변이시키면서 자신의 시말운동을 “장식품”이라고 언명하기까지 이른다.

 

나의 시를

고급 장식품이라고

누가 말했다고 한다.

잘한 말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장식품을

‘어떠한 의미에 의하여도 손상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그렇다.

의롱에 앉은 백동나비는

술어述語가 없다.

하늘에 뜬 해와 달이 그렇듯 나의 시는

‘어떠한 의미에 의하여도

손상되지 않는다.’

섭씨 39도에도 나의 시는

옷깃을 여민다. 「나의 시」전문,

 

「나의 시」는 『처용단장』에 언표 된 일련의 시말운동에 대하여 총체적으로 평가한 일종의 메타시이다. 일말 정당성도 있고, 또 타당하게 느껴지는 점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런데 애드가 알랜 포우가 자신의 대표작인 시 「까마귀」에 해설을 붙인 글을 읽고 보들레르가 조롱하듯이 한 말을 명심해야만 한다. 보들레르의 글을 이렇다. ‘여기 스스로의 시가 스스로의 시학에 의거해서 지어졌다고 주장하는 시인이 있다.’라고. 분명 김춘수는 자신의 시를 무의미시로 명명하고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여러 시론집을 통해서 자신의 시에 대하여 평설을 했다. 김춘수의 그것이 어느 정도 타당했고, 어느 정도 옳았다는 점에 이의를 달 수 없다. 그리고 기존의 연구나 평가들이 김춘수의 시론에 언급된 이론적 담론에 의거하여 『처용단장』의 연작들을 무의미시라는 제하에 서로 연관을 지어 연구를 수행했다. 그것도 일정 부분은 옳다.

 

그런데 문제는 김춘수의 『처용단장』이 시인의 의도한 바와 상관없이 무의미시가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난다면, 따라서 『처용단장』의 시말길이 의미과잉으로도 읽혀질 수 있다면, 기존의 연구나 평가들은 하나의 쓰레기가 될 우려가 있다. 물론 나도 한편의 학술논문을 쓴 적이 있다. 어쩌면 대가 시인의 언어적 전략에 기존의 연구자나 비평가들이 현혹되어 끌려다니고있는지도 모른다. 경계해야할 부분이다. 김춘수가 자신의 시를 아무리 무의미시로 명명하건 상관없이, 테리 이글턴이 『비평의 기능』에서 말한 公器로서의 비평의 임무를 충실하게 했어야만했다. 물론 나의 한편의 글이 이제까지 행해진 연구나 평가를 거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무의미시로 명명된 『처용단장』을 읽는 내내, 그것이 무의미시가 아니라는 예감을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만약에 김춘수의 그것이 언어의 과도한 탐미성에 의해서 기인한 현상이라면, 그때도 그것을 무의미시로 명명해야만 하는가. 처용 S라는 심급 위에 펼쳐진 『처용단장』은 언어적 표현가능성을 총체적으로 실험한 언어미학의 총아이거나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자하는 칸트적인 의미의 숭고미의 발현양상이다. 리오따르가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말한 바로 그것, 즉 포스트모더니즘의 미적 원리란 표현불가능한 것을 표현가능하게 만드는데서 찾았던 그것 말이다. 따라서 김춘수에게 시란 언어의 총체적 함수, 즉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개연적 사태들의 총합이다.

 

말하자면 시 「나의 시」에 언표 된 “장식품”의 시, “어떠한 의미에 의하여도 손상되지 않는” 시는 일련의 시론집에 언급된 자작시 해설이라는 자기 꾀에 스스로 넘어간 자승자박의 정의이다. 김춘수의 『처용단장』은 시인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상관없이, 의미와 무의미를 통섭하여, 말의 원상을 되비추는 절대운동, 즉 언어의 미적 가치를 온몸으로 체현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