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나뭇잎숨결 2020. 5. 21. 08:53

“모든 것은 죽어 없어지리라.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리라. /생명을/주관하는 자는/암흑의 혹성 저 너머로/마지막 태양의/마지막 빛까지도 불사르리라./오직/나의 고통만이/더욱 가혹하다-/나는 서 있다,/불 속에 휘감긴 채로,/상상도 못 할 사랑의/끌 수 없는 커다란 불길 위에.”(마야코프스키가 1917년에 쓴 장시 <인간>에서)

 

1930년 4월 14일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의 모스크바. 월초에는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이제는 날씨가 한결 따뜻해져 사람들의 옷차림도 화사해졌다. “탕!” 그런데 어디선가 화사한 옷차림을 어지럽게 만들어버리는 한 발의 총소리가 울렸다. 정부 출판국 사무실 근처의 작은 방에서 난 소리였다. 그 방문을 나와 걷던 여자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곧 그 작은 방에서 일어난 비극이 사방에 알려졌다. 당시 러시아를 대표하는 혁명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가 자신의 심장을 향해 권총을 쏜 것이었다. 그의 책상에는 이틀 전에 쓴 유서가 놓여 있었다.

 

 

여러분 모두에게
나의 죽음에 대해서 그 누구도 탓하지 마오. 그리고 이야깃거리로도 만들지 말아주오. 죽은 자는 가십을 싫어하오.
어머니, 누이, 동지들이여, 나를 용서하오. 이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여러분에게는 이 방법을 권하고 싶지 않소) 나로서는 다른 출구가 없었소.
릴리, 나를 사랑해주오.
정부 동지들, 릴리 브릭과 어머니, 누이들, 그리고 베로니카 비톨도프나 폴로스카야가 나의 가족이오.
이들에게 윤택한 생활을 보장한다면 고맙겠소.
완성하지 못한 시는 브릭 부부에게 주시오. 그들이 알아서 할 것이오.
그들 말대로, “사건은 끝났소.”

 

 사랑의 배가
    나날에 부딪쳐 부서졌다.
 삶과 나는 이해도 득실도 없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준
 상처와,
   아픔과,
     멸시를 일일이 헤아려도
                         승부의 득점은 없구나.

 

그대들 모두에게 최고의 행운이 깃들기를!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4/12/30

 


외모처럼 단단하고 강력하고 단호하고 가차없었던 혁명시인의 최후는 이처럼 허무했다. 아니 그의 죽음도 그의 시처럼 강력하고 단호하고 가차없었다. 36년 동안 그는 짧았지만 누구보다도 굵게 살았다. 십대 때부터 혁명의 대열에 뛰어들어 갖은 풍파를 겪어야 했고, 많은 시와 희곡을 썼으며, 세상을 뒤흔든 선언문을 발표했으며, 파격적이고 정열적인 사랑의 폭풍에 기꺼이 몸을 맡겼다. 만년에 자신의 뜻을 알아주지 못하는 정부와 문단과 대중들이 야속했지만, 그는 목숨을 스스로 정리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의 표정은 지극히 편안하여, 고통 속에서 삶을 끝낸 사람이 아니라 멀리 설레는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것과 같았다.

 

대중들의 의지를 고양시킬 선전선동시를 쓴 것으로 유명한 혁명시인 마야코프스키는 또한 전위주의 예술의 최전선에 있었다. 전위예술이 대체로 난해한 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즉각적인 반응을 끌어내야 할 선전선동시에 전위예술가가 참여했다는 것은 자못 흥미롭다. 그런 시세계처럼 그의 삶도 아이러니하다.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첫째, 그는 어떻게 혁명시인이 되었을까? 둘째, 그의 연인은 릴리 브릭인데, 어떻게 그녀의 남편 오십 브릭과 친구가 되어 함께 살게 되었는가? 셋째, 그는 왜 자살했는가?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야코프스키의 어린 시절은 그가 왜 혁명가가 되었고, 또 전위적인 시인이 되었는지를 자연스럽게 설명해준다. 마야코프스키는 1893년 7월 19일 그루지야의 바그다디(지금은 그의 이름을 따서 ‘마야코프스키’로 바뀌었다)에서 태어났다. 산림 감독관이었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말에 태우고 숲으로 갈 때가 많았는데, 이는 어린 마야코프스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산악 지대에서 자연과 함께 보냈던 어린 시절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도시를 동경하게 했는지 모른다. 그는 사춘기가 되자마자 도시인이 되어갔고, 시인이 된 후에도 자연을 노래한 일은 거의 없었다.

 

마야코프스키 가족은 러시아인이었는데, 바그다디 지역에는 주로 그루지야인들이 살고 있었다. 마야코프스키가 일곱 살이 되자 그의 부모는 자식을 러시아어로 교육시키기 위해 군청 소재지인 쿠타이시로 이사했다. 1902년에 김나지움에 들어가게 되는데, 마야코프스키는 자서전에 입학시험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했다. 면접관이 “오코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마야코프스키는 그루지야어로 착각하여 “3파운드”라고 대답했다. 면접관은 친절하게 고대 슬라브 교회 말로 ‘눈’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것 때문에 그는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고, 그때부터 그는 오래된 것과 교회와 관계된 것과 슬라브적인 것은 무엇이나 다 증오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이 아마도 자신이 미래주의와 무신론과 세계주의를 동경하게 된 원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많은 책을 읽었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모스크바에서 공부하는 큰누나의 영향으로 정치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방학 때마다 누나가 가져온 차르 체제에 반대하는 유인물은 마야코프스키가 보기에 ‘혁명’이었고 ‘시’였다. 소년 시절부터 그의 가슴속에서 혁명과 시가 하나로 녹아 들게 된 이유였다.


 

1906년 아버지가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나자 가족들은 빈털터리가 되어 모스크바로 이사했다. 어머니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하숙을 치면서 생활을 꾸려나갔다. 하숙생 중 한 명이 볼셰비키여서인지, 열다섯 살의 마야코프스키는 노동당원이 되었다. 마야코프스키는 선전원으로 활동하다가 1908년 처음으로 경찰에 체포된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금방 풀려나긴 했지만, 이듬해에 체포되었을 때에는 독방에서 11개월이나 보내야 했다. 청소년 시절에 이런 고초를 겪으면 기가 꺾이게 마련이지만, 이 맹랑한 소년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독방 생활이 자신에게 대단히 소중한 체험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독방에서 동시대 작가들의 글을 끊임없이 읽었으며, 꾸준히 시를 썼다. 시는 간수에게 압수당했지만, 감옥에서의 시 창작이 좋은 수련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혁명시인은 자연스럽게 역사 속으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야코프스키는 석방된 뒤 모스크바 미술학교를 다녔는데, 거기서 중요한 친구를 만나게 된다. 그보다 열 살이나 많은 학생 중에 미래파 화가 다비드 브를류크가 있었던 것이다. 단 한 편의 시를 읽고 부를류크는 마야코프스키의 천재성을 알아보았다. 부를류크는 마야코프스키를 “나의 훌륭한 친구이자 천재시인”이라고 소개했다. 마야코프스키가 “왜 나를 천재시인이라고 소개했느냐”고 항변하자 부를류크가 소리쳤다. “그러니까 너는 써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나까지 바보가 되는 거야, 알지?” 이렇게 마야코프스키는 시를 써야 하는 운명에 접근해가고 있었다. 그것도 미래파 시인으로서 말이다.

 

1912년 12월 마야코프스키는 부를류크가 작성한 그 유명한 미래주의 선언문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에 서명한다. 모범적인 모델로 제시되고 있는 모든 과거의 전통을 과감하게 깨부수자는 과격한 선언이었다. “과거는 갑갑하다. 아카데미와 푸슈킨은 상형문자보다 더 이해하기 힘들다. 푸슈킨,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을 현대라는 기선에서 던져버려라.” 전통을 깨부수자는 것은 1909년의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의 미래파와 상통하지만, 무솔리니파시즘을 옹호한 마리네티의 미래파와 차르 체제에 반대한 러시아 미래파는 엄연히 달랐다. 이들의 선언문은 같은 제목의 사화집에 실렸는데, 그 사화집에 시 <밤>과 <아침>을 발표함으로써 마야코프스키는 대중 앞에 서게 된다.

 

 

 

이후 마야코프스키의 문학적 행보는 참으로 눈부셨다. 그의 시는 자기 주장이 매우 강하고 도전적이었으며, 자아에 대한 과도한 긍정과 더불어 대상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표출했다. 1913년 첫 시집 <나>를 시작으로, 1915년에는 장시 <바지를 입은 구름>과 <등골의 플루트>를 발표함으로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1917년 혁명이 일어나자, 온몸으로 혁명정신이 차 올랐던 마야코프스키는 그야말로 물을 만난 물고기였다. <혁명 송시>(1918), <좌익의 행진>(1919)은 대중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시였다. 1924년 레닌의 죽음을 추모하는 장시를 써내기도 했다. 이런 시들이 또한 미래파의 전위주의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 우리에겐 다소 기이하게 보일 수 있다.

 

 

시에 열정적이었듯이, 마야코프스키는 여인에 대해서도 열정적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연인은 릴리 브릭, 마야코프스키가 존경하는 문학평론가 오십 브릭의 부인이었다. 1915년 7월 15일 브릭 부부와 릴리의 여동생 엘자 트리올레가 함께 한 자리에서 마야코프스키는 자신의 장시 <바지를 입은 구름>을 낭송했다. 이 시를 들은 이들은 모두 그의 팬이 되었고, 특히 릴리는 그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릴리는 마야코프스키와 깊은 관계까지 발전하게 되자 이를 남편에게 고백했다. 이미 마야코프스키의 후원자가 된 오십은 릴리에게 “우리는 절대로 헤어져서는 안 되오”라고 말하며 아예 셋이서 함께 살 것을 제안했다. 이렇게 하여 세 사람의 기이한 동거가 시작되었고, 브릭의 아파트는 미래파 예술가들의 문학살롱이 되었다.

 

마야코프스키가 성년이 되어 줄기차게 사랑했던 여인은 릴리 브릭이었지만, 다른 여인들에게도 정염을 바치곤 했다. 특히 프랑스에서 만난 타티야나 야코블레바와의 사랑은 가슴 아프다. 마야코프스키는 문학으로 성공한 후 여러 나라를 여행한다. 어린 시절부터 러시아적인 것을 싫어해서, 외국 여행을 통해 다양한 문화를 접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독일, 폴란드, 체코, 프랑스 등 유럽은 물론 미국과 멕시코에도 다녀왔다. 1928년 프랑스에서 엘자 트리올레를 통해 타티야나를 만나게 되는데, 마야코프스키는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대와 나는/모스크바에서 필요한 사람,/거기엔 다리가 긴 사람이/부족하오”라고 쓴 시 <편지>는 타티야나를 언젠가는 러시아로 데려가겠다는 마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시이다. 이듬해 4월 마야코프스키는 파리에 다시 와서 타티야나로부터 10월에 결혼할 것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마야코프스키가 신청한 비자가 거절당했고, 그것으로 둘의 혼인은 물거품이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타티야나는 어느 자작과 결혼했다.

 


마야코프스키는 왜 이토록 여러 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일까? 타티야나와 혼인하기로 한 동안에도 그는 노라 폴론스카야라는 젊은 여배우와 사랑에 빠졌다. 가치관에 따라 달리 볼 수 있겠지만, 마야코프스키의 애정행각을 무조건 비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의 사랑이야말로 진정으로 순수한 것이었다. 그는 계산하지 않았으며,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열정에 충실할 수 있었다. 열정적이고 즉흥적인 그의 문학세계와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그의 작품이 의도적인 실험이 아니듯이, 그의 여성관계도 의도적이었다기보다는 몸과 마음의 실존적인 요구에 충실한 결과였다. 전통을 부정하였듯이 이성에 의한 통제를 부정하고 감각에 충실한 것 또한 마야코프스키에게는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마야코프스키의 시는 점점 무르익어갔지만, 소비에트 공산주의 정부와는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신경제정책과 함께 등장한 소부르주아 세력과 관료주의는 혁명의 순수성이 변질된 것이었다. 그의 의식은 엄밀히 개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통제된 사회와는 맞지 않았다. 그가 누구보다도 자아를 중시하는 사람이었음은 첫 시집 제목이 <나>였다는 것만으로도 증명된다. 그의 문학 속에도 암암리에 관료화된 정부를 비판하는 태도가 엿보였으며, 개인주의적인 성향 또한 스며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새로운 정부의 적이 될 수는 없었다.  마야코프스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정부도 그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결국 정부의 억압적인 정치 경향을 꼬집은 연극 <목욕탕>이 참담하게 실패하면서 마야코프스키의 절망감은 극에 달하게 된다. 1930년 2월 1일, 마야코프스키는 프롤레타리아 작가동맹 건물에서 ‘작품 20년’ 전시회를 열었는데, 여기에서도 정부 편 작가들은 몰려드는 학생들을 돌려보냈다. 러시아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RAPP)에 가입하여 신뢰 회복을 꿈꾸어보았지만 괴리감만 더 커졌다. 마야코프스키의 고독은 깊어만 갔다. 사랑도 사라지고 자신의 시도 설 자리가 없어졌다. 그는 절망 속에서 <목청을 다하여>라는 시를 썼다.

 

선전과 선동이,
                    내 마음에도 역시
                                           걸렸다,
차라리 난
             당신들을 위해서
                                   로맨스를 쓰고 싶었다—
좀더 이롭고
                좀더 매력 있는.
그러나 나는
                나를
                      억누르고
                                  내 노래의
목청을 
         짓밟았다.

 

나의 시는 그대들에게 가리라,
                                        모든 시대의 절정을 뛰어넘어.
그리고 시인과 정부를
                            앞질러


<목청을 다하여>에서(신동란 역)

 


1930년 3월 마야코프스키는 신경쇠약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한다. 마야코프스키는 다시 일에 파묻혔지만, 자신의 운명 전체를 감싸 안은 듯한 절망감은 도저히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1930년 4월 14일, 여배우 노라 폴론스카야가 나간 직후 마야코프스키는 서랍에서 권총을 꺼냈다. 혁명에 정열을 바쳤지만, 정작 혁명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는 그 혁명세력 때문에 마야코프스키는 결국 죽음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이다. 그가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험난한 행로가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마야코프스키를 각별히 사랑했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혁명에 대해 비판적인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대숙청 기간에 전전긍긍했던 것이 이를 증명한다. 마야코프스키는 근본적으로 봉건적 왕정을 타파하는 것을 열광적으로 환호했지만, 그는 사실상 어떤 절대주의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꿈이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고 느꼈을 때 자신의 시처럼 단호했다. 그것 또한 충동적인 몸과 마음의 요구에 따른 결과였다. 그의 몸은 순간적으로 사라졌지만, 그러나 그의 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망치질을 하고 있다. “오늘날에도/시인의 압운은/애무이자/슬로건이자/칼이자/채찍”(<재무 감독관과의 시에 관한 대화>)이기 때문일까?

 

 

앤 차터스와 새뮤얼 차터스가 쓴 <마야코프스키 - 사랑과 죽음의 시인>(신동란 옮김, 까치)은 마야코프스키와 릴리 브릭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마야코프스키의 삶과 사랑을 드라마틱하게 그린 책이다. 소설보다도 흥미롭게 마야코프스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마야코프스키 선집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김성일 옮김, 책세상)는 마야코프스키의 작품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엮은 책이다.


마야코프스키 - 사랑과 죽음의 시인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마야코프스키와 에이젠슈타인

 

1부는 서정시를 발표순으로 모았고, 2부는 장시 <전쟁과 세계>를 수록했다. 특히 3부에 모아놓은 선언문들을 통해 러시아 미래파의 주장을 가감없이 들여다볼 수 있다. 마야코프스키와의 가상인터뷰도 아주 재미있다. 상상 속에서 들어본 마야코프스키의 발언 한 대목이다. “무수한 혁명을 겪었지만, 우리의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미완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어야 하는 혁명의 숙명 때문이다.”

 

엘스베트 볼프하임의 <마야코프스키와 에이젠슈타인>(이현정 옮김, 아카넷)은 동시대의 예술가의 삶을 함께 그린 독특한 전기이다. 마야코프스키는 ‘20세기의 위대한 혁명시인’이고, 에이젠슈테인은 ‘몽타주 기법을 도입한 20세기 영화예술의 거장’이다. 두 예술가는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지만 불행하게 인생을 마감했다. 그들이 검열보다도 더 괴로워했던 것은 교양 없는 동지들에 맞서서 끊임없이 자신들의 정당함을 입증해야 했다는 점이다. 이 두 사람을 통해 시대가 당대의 위대한 예술가를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실감하게 된다. 

 

<마야꼬프스끼 전집>(전3권, 석영중・김규종 옮김, 열린책들)은 마야코프스키의 모든 작품을 망라한 소중한 자료이다. 1권은 시인 자신의 출생에서부터 성장 과정을 단편적으로 기록한 연작시 <나 자신>을 권두로, <바지를 입은 구름>, <등골의 플루트>, <인간> 등을 수록했으며, 2권은 세 편의 장시와 산문을 담았고, 3권은 희곡을 담았다. 전집이 부담스러운 사람을 위해 <마야꼬프스끼 선집>(석영중 옮김) 으로도 추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