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 (낭송 이금희)

나뭇잎숨결 2020. 5. 15. 18:40






  •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 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 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1.


    시를 쓰고, 시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문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누군가와 소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계를 건너가며 서로의 언어를 매개로 동행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상처에 한 상처를 기대게 하는 것이다.

    인류의 모든 시는 '상처에 대한  보고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처를 모른다면(없다면) 시는 씌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읽혀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를 발표하기 위해 감상리포트를 쓰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시를 읽으면서 시 속의 화자가 걸어간 길을 함께 걸어보는 것이 시를 감상하는 것이다.

    시를 감상하다 보면 떠오르는 다른 시나, 글, 혹은 문학이론서가 있을 것이다.

    그것들 속에는 또 다른 상처들이 있을 것이다.

    그 상처와 상처들을 포개고 겹치면서, 우리의 상처를 병치시켜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이 감상이다.



    2.


    허수경 시인의 <혼자 가는 먼 집>을 읽어 보자.


    나의 언어를 시인의 언어와 섞어, 시 속의 화자가 걸어갔을 먼 길을 함께 걸어가 본다.

    허수경 시인 생전에 이 시를 읽었을 때와

    시인이 독일에서 부음을 전해온 후에, 이 시를 읽을 때의 언어의 파동이 다르다.

    시를 읽다보면 내 언어가 시인이 내민 언어를 알아보고, 그의 언어에 다가가 슬며시 손 잡는 부분이 있다.

    피안으로 넘어가면서 남겨놓은 시인의  언어가 내 어깨에 기댄다.

    축약과 절제의 문학인 시의 본질이라는 투망으로 걸러내고 걸러내다 맨 나중까지 남은 언어들...

    그 씌여진 말들과 함께 행간에 숨어 있던 말들이 어느 순간 함께 동행한다. 

    그 언어의 등뒤에 다가가 가만히 그 언어의 뒷면 혹은 이면, 그 등에 얼굴을 묻는다.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 봅니다 킥킥거리며"


    '당신'이란 2인칭 대명사는 흔히 쓰이는 말이지만, 나는 이 '당신' 이란 대명사를 아무에게나 쓰지 못한다.  

    '그대’는 어떻게 ‘당신’이 되는가. '그대'라는 호칭은 너무 말끔하다. 허수경 시인은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 와 저를 부빌 때’라고 말한다. 상처를 아는 ‘사내’가 아름다울 때,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기댈 수 있을 때, 그는  ‘당신’이 되기도 한다.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그대' '당신' 이 된다. '부빈다는 것' 그것은 다정(多情)이고 병(炳)이기도 할 것이다.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에서, 이 병(炳)은 '치병'에 가깝다. 생내적인 타고난, 다정이 병인, 불치병이다.


    허수경 시인의 <혼자가는 먼 집>을 읽을 때마다, 이 '당신' 이란 말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내 안에 가득찬다.

    '당신'이란 이 인칭대명사의 원심력에 견디다 못해, 나는 나의 '당신'을 찾아나선다.

    77억 인구중에 '당신'이란 단어를 쓸 사람이 없겠는가? 찾다보니, 찾아졌다.

    '당신'이란 어감과 품위에 꼭 맞는, 내 눈높이에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나의 '당신'을 찾았다.

    그래도 어색하다. 시인은 이를 '...킥킥거리며' 라고 쓰고 있다.

    차마 2인칭 '당신'으로 못 부르고, 혼자, 가만히 3인칭 재귀대명사로 불러본다. *** 당신!

    롤랑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이것을 '언어는 스스로 만지는 것을' 좋아한다'1)라고 표현한다.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시인은 마지막 행에서, 타인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십자가'에 비유한다. 누군가의 삶의 무게를 가만히 바라보는 힘이 시를 쓰는 힘이라면, 누군가의 시를 읽는 마음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그가 사라진 뒤에도 그 자리에 멈춰서서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 그런 힘일 것이다. 정끝별 시인은  이 시에서 '참혹'을 ‘당신’으로 상정되는 모든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총체적 풍경이라고 말한다. 개인이 겪어낸 참혹이 있을 수도 있고,  신념을 잃어버린 한 시대의 참혹, 끝내 버릴 수 없고 무를 수도 없는, 죄다 마음에 묻어야 하는 참혹, 총체적 '참혹'이라고 말한다. '참혹한' 그런 당신을 웃으면서, 울면서, 혹은 취해서, 부르는 이 시의 언어는, 언어 이전이거나 언어 이후의 언어로, 형체가 없는 풀려버린 언어다. 특히 단속적인 말줄임표와 쉼표,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킥킥’이라는 의성어에는, "참혹인 줄 알면서도 참혹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자의 내면 풍경" 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처럼 서둘러 슬픔을 떠나보내지 않을 수 있는 것..."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터지기직전, 절정까지 이른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지그시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간절한 한 사람의 시간을 붙들고 있는 것, 그 시간을 공감하는 것, 간절한 어느 순간이 가지는 강렬한 사랑을 향한 힘. 그것이 시를 쓰는 시간일 것이다.2)타인의 시간을 고이 접어 바라보는 마음...그것이 시를 쓰는 마음이고, 시를 읽는 마음일 것이다.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이쁜 당신" 사랑의 마음과 마음의 무덤, 환후와 치병이 ‘각각 따로’이기에, '당신과 함께했던 세월과, 당신과 함께하지 못할 세월이' 얽히고설키면서 만든 마음의 무덤. 사랑과 상처와 그 상처의 몸이 모두 '적요'이고, '울음'이다. '무엇을 나누다가 받은 상처 뿐 아니라, 아무 것도 나눌 수  없어서 받은 상처', 끝난 사랑이 아니라 시작도 못해본 사랑, 한 말이 아니라 삼켜버린 말들, 살아보지도 못하고 지워버린 시간들, 그 모든 '마음의 무덤'에 벌초하러 간다. 진설 음식도 없이, 술 한 병 놓고, 술 한잔 당신 몫으로 따라 놓고, 자작하며, 결국, 이승의 강을 건너가 먼 집(죽음)으로 돌아가는 인간이란 모든 운명에 대한 배웅, 애도!


    결국 시를 읽는다는 것은, 한 언어가 또 다른 언어에 기대어,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혹은 얼굴을 부비며 싫컷 울어보는 것이리라. 웃을 자유를 빼앗겼다면, 울 자유라도 만끽해야 하지 않겠는가? 펑펑 울어라 시여! 꺽꺽 울어라 독자여! 예수를 보고 울지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보고 하염없이 울어라! 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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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나는 그 사람을 내 언어로 문지른다. 마치 손가락 대신에 말이란 것을 갖고 있다는 듯이, 또는 내 말 끝에 손가락이 달려 있기라도 하듯이, 내 언어는 욕망으로 전율한다. 이 두근거림은 이중의 접촉에 기인한다. 한편으로는 모든 담론 행위가 나는 너를 욕망한다.”라는 유일한 시니피에를 은밀히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양분을 주고 가지를 치며 폭발하게 하는 것이라면 (언어는 스스로 만지는 것을 즐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그 사람을 내 마음 속에 둘둘 말아 어루만짐을 이야기하며 우리의 관계에 대한 논평을 귀속하고자 온 힘을 소모한다.“(롤랑바르트 <사랑의 단상>.p101)


    2)"시를 쓰던 순간은 어쩌면 그렇게 다른 이가 잊어버리고 간 십자가를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십자가라는 것이 한 종교에 속한 상징이라면 다른 종교에 속한 어떤 상징도 마찬가지이다. 간절한 한 사람의 시간을 붙들고 있는 것, 그 시간을 공감하는 것, 그것은 시를 쓰는 마음이라는 생각을 나는 하곤 한다. 사람의 시간뿐 아닐 것이다. 어린 수국 한 그루를 마당에 심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기 새들이 종일 지저귀던 늙은 전나무에 있는 새집을 바라보던 시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간절한 어느 순간이 가지는 강렬한 사랑을 향한 힘. 그것이 시를 쓰는 시간일 것이다. 시를 쓰는 순간 그것 자체가 가진 힘이 시인을 시인으로 살아가게 할 것이다."(허수경)
    The act of writing a poem may be the same as looking upon a cross someone has left behind. Symbols unrelated to religion are similar. I sometimes think considering a person’s earnest experiences, and empathizing with those times are the heart of writing poetry. It works with non-human experiences as well; watching a little hydrangea tree in the yard during mornings and evenings is the same. Observing a nest in an old fir tree, with little birds twittering all day long is the same. An earnest moment holds the power of intense love. That may be the time of writing poetry. At that moment, the power of the act lets a poet live as a po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