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시, 한 잔의 붉은 환지통

나뭇잎숨결 2020. 5. 28. 14:18

 

시, 한 잔의 붉은 환지통-김혜순, 한 잔의 붉은 거울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는 시가 어떻게 씌어지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가 씌어 졌다는 것은 시인이 겪고 있는 ‘환지통’을 다시 반복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환지통(幻肢痛)은 팔다리를 절단한 환자가 이미 없는 수족에 아픔과 저림을 느끼는 현상이다. 시인에게 환지통은 포기할 수 없는 '환(幻)'이다. 아니, 시인에게 ‘환지통(幻肢痛)’이란 ‘'환(幻)’이 없다면 그는 결코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므로, 환지통은 시인의 사용설명서이자, 존재증명서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시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 속에 재현된 화자의 환지통을 함께 겪어 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렇다면, 시를 읽는 독자가 갖고 있는 환지통이 없다면 그 시를 읽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도 말 할 수 있겠다. 시인이 겪고 있는 환지통이 시의 화자를 통해 재현되고 있다면, 환지통이 없는 사람이 어찌 화자의 환지통을 읽어낼 수 있겠는가. 시를 통한 소통이란 환지통과 환지통이 만나 그 환지통을 심화시키거나, 그것을 넘어서거나, 건너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화자가 겪는 환지통을 읽어내는 것은 시를 읽는 문법 가운 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 한국 시사에서도 지독한 환지통을 겪어내게 만들었던 시인들이 있었다. 죽어도 죽지 않은 시인들이 있었다. 그 시인들 가운데 지독한 환지통 ‘이상’이 있다. 이상은 고유명사이자 여전히 진행중인 하나의 문학 현상이다. 한국의 모든 시인들 아니 소설가들이 이상이라는 환지통을 겪어내지 않고 문학의 강을 건너간 적은 없어 보인다. 문학연구가, 비평가, 독자 모두 ‘이상’이란 환지통을 한번쯤은 겪어내며 한국문학이라는 도저한 흐름에 동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을 모방하거나 ‘이상’을 극복하려는 부단함 속에서 아직도 ‘이상’은 죽었으나 여전히 살아 있는 문학의 ‘환지통’, 환(幻)의 유령이라 할 수 있다.

 

 

여기 한 페이지 거울이 있으니 /잊은 계절에서는 /얹은 머리가 폭포처럼 내리우고 /울어도 젖지 않고 /맞대고 웃어도 휘지 않고 /장미처럼 착착 접힌 귀 //들여다 보아도 들여다 보아도 /조용한 세상이 맑기만 하고 /코로는 피로한 향기가 오지 않는다. //만적 만적하는 대로 수심이 평행하는 /부러 그러는 것 같은 거절 /우(右)편으로 옮겨 앉은 심장일망정 고동이 /없으란 법 없으니 //설마 그러랴? 어디 촉진.........하고 손이 갈 때/지문이 지문을 가로 막으며 /선뜩하는 차단뿐이다. //오월이면 하루 한 번이고 /열 번이고 외출하고 싶어 하더니 /나갔던 길에 안 돌아오는 수도 있는 법 /거울이 책장 같으면 한 장 넘겨서 /맞섰던 계절을 만나련만 //여기 있는 한 페이지 /거울은 페이지의 그냥 표지---

 

-이상, 「명경(明鏡)」

 

 

이상은 「오감도」 계통에서 뿐 아니라 모든 문학교과서에 실려 있는「거울」 시편을 통해 세계와 불화하는 소통불가능성, 타자와의 차단이라는 하나의 은유를 생산했다. 이상의 시에서는 화자와 세계라는 대상은 동시에 지워진다. 화자와 대상이 지워진 시란, 두 사람이 만나 구축한 세계가 없다는 의미다. 비극의 담담함이란 구축한 세계가 없다는 비극의 비극일 것이다.

 

이상의 「명경(明鏡)」 에서는 “열 번이고 외출하고 싶어 하더니 /나갔던 길에 안 돌아오는 수도 있는 법” 이라며 외출한 타자와의 소통이 단절된 세계란 이미 예측가능했던 세계였음을 담담한 포기의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포기의 담담함이라는 포기의 예측이므로, 그 시간의 궤적을 추론하는 것은, 이상의 전기적 사실만으로도 어렵지 않다. 이상이 1930년대 겪어냈던 마땅히 아파야 하는 상황에서도 아픔마저도 느끼지 않으려는(못하는) 통증없는 환지통이라는 환(幻), 시를 쓰게 만들었던 지독한 ‘환(幻)’ 외에는 '다른 사정은 없는 게 낫다'고 할 마이너스의 상태. 이상이라는 환지통은 시대를 건너 수없이 많은 변종, 유사한 환지통을 만들며, 우리 시대 시인들이 겪는 환지통과 눈물도 없이 '거울'을 통해 재회한다.

 

「한 잔의 붉은 거울」을 쓴 시인 김혜순의 시에서 이상의 ‘거울’이 어떻게 극복되고 있는지 읽을 수 있다. 「한 잔의 붉은 거울」의 김혜순 시인은 ‘너’라는 타자를 담담히 포기하기 전, '너'라는 세계에 취한 화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것은 타자와 소통불가능이란 측면에선 비극이지만, 여전히 화자가 세계를 강렬하게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극의 넘어섬이다. 이상의거울에선 집이 없다. 화자와 대상, 즉 둘이 만나 구축한 세계가 없다. 그러나 김혜순의 거울에서는 아우성치는 '집'이 있다. 그것이 오늘의 시인들이 이상의 환지통을 극복한 지점일 것이다.

 

김혜순은 말한다. “모든 시는 연애시이다. 모든 시는 풍자시이다. 그리고 또 모든 시는 연애시이면서, 풍자시이다. 연애시는 풍자시를 지향하고, 풍자시는 연애시를 지향한다. 그러나 시가 연애를, 혹은 풍자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시가 연애시이면서 풍자시인 것은 시라는 장르가 시를 쓰는 시적 자아에게 '자기 지우기'를 요구하는 잔인한 애인과 같기 때문이다. 연애시를 시도하는 시인에겐 만들면서 부수기를, 풍자시를 쓰는 시인에겐 부수면서 만들기를 요구하는 변덕쟁이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모든 시가 연애시인 것은 연애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 주체와 타자가 만나 또 다른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시처럼, 연애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자연을 창조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연애가 운명에 대한 뼈아픈 발견이며, 그에 따른 고통에 찬 선택이고, 죽음을 부르는 도전이 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 속으로 파고듦과 동시에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상대방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려는 이중의 본능을 수행하려 한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누구보다도 고독하고, 또, 누구보다도 당신과 나 사이에 차이를 없애려는 역설적인 의지를 가진다. 이 이중 자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은 지금 이 순간 시의 삶을 수행 중인 시적 자아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김혜순의 시에서는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이중 자아의 허우적거림으로 인해 과도하게 이미지가 난무한다. 김혜순 시의 이미지야말로 이 시인의 실존 그 자체가 아닐까 여겨질 만큼, 김혜순의 시들은 온통 이미지들로 넘친다. 그녀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것을 이미지라는 구체적 사물로 물리치겠다는 단호한 거부처럼 읽혀진다.

 

 

「한 잔의 붉은 거울」을 읽어보자.

 

 

네 꿈을 꾸고 나면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창들은 불을 다 끄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밤거리

간판들만 불 켠 글씨들 반짝이지만

네 안엔 나 깃들일 곳 어디에도 없구나

 

아직도 여기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 속인가 보다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고독이란 것이 알고 보니 거울이구나

비추다가 내쫓는 붉은 것이로구나 포도주로구나

 

몸 밖 멀리서 두통이 두근거리며 오고

여름밤에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이 길에선 따뜻한 내면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이 거울 속 추위를 다 견디려면 나 얼마나 더 뜨거워져야 할까

 

저기 저 비명의 끝에 매달린 번개

저 번개는 네 머릿속에 있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네 속에는 너밖에 없구나 아무도 없구나 늘 그랬듯이

너는 그렇게도 많은 나를 다 뱉어내었구나

 

그러나 나는 네 속에서만 나를 본다 온몸을 떠는 나를 내가 본다

어디선가 관자놀이를 치는 망치 소리

밤거리를 쩌렁쩌렁 울리는 고독의 총소리

이제 나는 더 이상 숨 쉴 곳조차 없구나

 

나는 붉은 잔을 응시한다 고요한 표면

나는 그 붉은 거울을 들어 마신다

몸속에서 붉게 흐르는 거울들이 소리친다

너는 주점을 나와 비틀비틀 저 멀리로 사라지지만

그 먼 곳이 내게는 가장 가까운 곳

내 안에는 너로부터 도망갈 곳이 한 곳도 없구나

 

                                                                              ㅡ『한 잔의 붉은 거울』(문학과지성사, 2004)

 

 

①네 꿈을 꾸고 나면 오한이 난다/열이 오른다 창들은 불을 다 끄고/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밤거리/간판들만 불 켠 글씨들 반짝이지만/네 안엔 나 깃들일 곳 어디에도 없구나

 

화자는 너라는 타자와의 소통불가능을 관념이 아니라 ‘온 몸’으로 느낀다. 오한과 열, 불을 끄고, 불 켠, 이란 상반된 상황 속에서 “네 안엔 나 깃들일 곳 어디에도 없구나”라고 현실을 직시한다.

 

②아직도 여기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 속인가 보다/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고독이란 것이 알고 보니 거울이구나/비추다가 내쫓는 붉은 것이로구나 포도주로구나

 

여기서 너는 소통할 수 없다는 점에서 ‘거울’, ‘고독’이나 다를 바 없다. 거울이란 사물이 고독이라는 관념을 낳는다. 여기서 이상의 거울이 소환된다. “비추다가 내쫓는 붉은 것이로구나 포도주로구나” 그런데 여기서 화자는 그것이 거울이고, 고독인줄 분명히 알면서도 그것을 붉은 포도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이상을 성큼 뛰어넘는다. 이상의 거울은 그냥 포기된 저기 저만치 놓여 있는 세계, 사물화된 거울이었다면, 여기서 너라는 세계는 밀어내면서, 동시에 취할 수도 있는 술, 포도주, 구체적인 것, 그 무엇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③몸 밖 멀리서 두통이 두근거리며 오고/여름밤에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이 길에선 따뜻한 내면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이 거울 속 추위를 다 견디려면 나 얼마나 더 뜨거워져야 할까

 

두통과 오환과 열을 견디며, 화자는 “이 거울 속 추위를 다 견디려면 나 얼마나 더 뜨거워져야 할까”라고 자문한다. 그것은 너라는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는 화자의 문제로, 문제의 방향을 선회한다. 취해도 덥힐 수 없는 그 오한의 이름을 묻고 있는 것이다.

 

④저기 저 비명의 끝에 매달린 번개/저 번개는 네 머릿속에 있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네 속에는 너밖에 없구나 아무도 없구나 늘 그랬듯이/너는 그렇게도 많은 나를 다 뱉어내었구나

 

너라는 세계는 너밖에 존재할 수 없는 세계라는 인식, 애초에 너는 그 무엇도 수용할 수 없는 그런 세계, 그래서 “그렇게도 많은 나를 다 뱉어내었구나”라는 그런 세계, 그 지점에 이르러서야 ‘나’라는 존재의, 욕망의 과포화상태가 너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를 바라본다. 받아들여 질 수 없었음을 바라본다. 너라는 세계의 크기와 나라는 세계의 크기, 너의 취함과 나의 취함의 차이...네가 취할 때 나는 깨어 있고, 내가 취할 때 너는 깨어 있는 취함의 다름...너와 나는 그런 다른 세계...

 

 

⑤그러나 나는 네 속에서만 나를 본다 온몸을 떠는 나를 내가 본다/어디선가 관자놀이를 치는 망치 소리/밤거리를 쩌렁쩌렁 울리는 고독의 총소리/이제 나는 더 이상 숨 쉴 곳조차 없구나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네 속에서만 ‘나’의 상태를 진단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너만 오직 나의 진단키라는 것이다. 너라는 세계는 그런 현실인식이나 진단의 ‘매개체’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⑥나는 붉은 잔을 응시한다 고요한 표면/나는 그 붉은 거울을 들어 마신다/몸속에서 붉게 흐르는 거울들이 소리친다/너는 주점을 나와 비틀비틀 저 멀리로 사라지지만/그 먼 곳이 내게는 가장 가까운 곳/내 안에는 너로부터 도망갈 곳이 한 곳도 없구나

 

몸속에서 붉은 거울들이 소리치듯, 어떤 소통에 대한 갈망으로 넘쳐났지만, 이제 알고 보니 너 역시 술취한 세계일 뿐, 그래서 비틀비틀 사라지는 그런 세계일 뿐, 그럼에도 ‘나’는 너로부터 도망갈 곳이 한 곳도 없구나, 라는  지점에 이르러, 세계에 모르고 취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알면서도 취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취함의 몽환! 몽생몽사, 취함의 몽환이 김혜순 시편에서 넘쳐나는 이미지들로 모아지는 ‘환지통’이라 할 수 있다.

 

취함에 대한, 어떤 연구자의 일변을 들어 보자. “알다시피 술이란, 촉촉이 젖어드는 '물'의 속성과 활활 타오르는 '불'의 속성을 한 몸에 지닌 모순적 존재이다. 그런데 김혜순은 이 두 가지의 속성에다 나와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제3의 속성을 보탠다. 거울을 통해서 보는 것은 환(幻)이다. 환이란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그 점에서 술과 거울은 내통한다. 이 시의 문법으로 말한다면 술은 '한 잔의 붉은 거울'이다. '한 잔'과 '붉은'과 '거울'은 제 각기 다른 지점을 비추어서 전체를 조명해낸다.”

 

'한 잔'은 실존의 고독을 비춘다. 이 고독은 존재의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 고독과 관계들로부터 오려내어진 상대적 고독을 다 아우르고 있다. "깃들일 곳 어디에도 없"고 "도망갈 곳이 한 곳도 없"는, '나'에게서까지 추방당하는 철저한 고독이 고개숙이고 있다. 따라서 그곳은 "오한"과 "추위"가 습기를 머금고 서식한다. '한 잔'은 이 고독의 내면을 촉발시키며 '붉은'과 이어진다.

 

'붉은'은 그래서 고독의 한쪽 끝을 붙들고 내 속의 광기를 붉게 비춘다. 즉, "(고독이란) 비추다가 내쫓는 붉은 것이"다. 그 붉음은 "몸 밖 멀리서 두통이 두근거리며" 오게 하고, "비명의 끝에 매달린 번개"를 머릿속에 가두어 "관자놀이를" 망치로 치게 한다. 붉음이 내려치는 망치 소리는 "밤거리를 쩌렁쩌렁 울"려 "고독의 총소리"로 다시 반향(反響) 되기도 한다. 고독과 광기에 쫓겨 "이제 나는 더 이상 숨 쉴 곳조차 없다". 나를 둘러싼 세계는 "불을 다 끄고" "(간판의) 불 켠 글씨들"만 살아서 문장을 만들지만 불행히도 나는 이 "밤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나'를 숨기고 숨돌릴 곳은 '나'밖에 없다.

 

'거울'은 이런 '나'를 비춘다. 나는 술을 마시고 술은 그런 나를 비추는 것이다.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은 거울 밖의 '나'면서 동시에 거울 속의 '나'이다. 내가 나를 마시고 내가 나에게 취한다. 이 고독과 취기(혹은 광기)는 '새로운 나'(여기서는 '너')를 창조한다. "나는 네 속에서만" "온몸을 떠는 나를" 본다. 그러나 환(幻)으로서의 너는 "주점을 나와 비틀비틀 저 멀리로 사라지지만/그 먼 곳이 내게는 가장 가까운 곳"이다. '너'는 내 안에 살기에 너로부터 도망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울을 통해서 나는 너의 포로면서 너는 나의 포로임을 확인할 뿐이다.

 

「한 잔의 붉은 거울 」은 이렇듯 모순 투성이인 채로 나를 비추고, 나를 그 속에 가둔다. 바꾸어 말하면 '한 잔의 붉은 포도주'는 나의 고독과 광기와 방황과 분열을 호명하고 그것들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한 잔의 포도주에 의탁하여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타자화된 나를 통해 숨겨진 (혹은 숨길 수밖에 없었던) 나를 본다.

 

「한 잔의 붉은 거울은」 제목부터 시작해서 붉은색이 낭자하다. 붉은 전선, 붉은 장미꽃다발, 빨간 물고기, 붉은 파도자락… 붉은 구름, 붉은 벼랑, 붉은 아기, 붉은 양수… 붉은 살 꽃, 붉은 실타래, 붉은 이슬, 붉은 나무… 그러다가 종국엔, 그 붉은 색감의 뜨거움 때문인지 ‘붉은’이란 형용사마저 증발하고 언어 그 자체의 열기만이 깔리는데, 그 열기 역시 여전히 붉은 느낌이다. 시원(始原)의 붉은색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 색감은 도대체 어디서, 왜, 어떻게 흘러나와 번지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이런 질문으로부터 시집 읽기의 실마리를 푸는 것은, 그녀가 다른 무엇이기에 앞서 치열한 이미지의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말씀” 즉 “교란의 거울”에 맞서, 이 세상을 전혀 다르게 느끼고 구축하는 몸의 언어, 육체적 감각의 언어, 즉 이미지의 언어로 버틴다. 김혜순 시인이 갖고 있는 다른 거울의 이름이다. 시인은, “나는 해독하지 못한다” “내가 너무 많아 정말, 죽을 지경”이라 느낄 만큼 어지럽게 분열․증식하는 시적 발화의 다성적 양태가 덧대어진다. 그러나, 꿈이 또한 그러하듯이 그 불투명한 이미지들은 끈덕지게 반복되는 어떤 강박적인 것들 둘레로 모여 회오리처럼 맴돌 뿐 아니라, 그 다성적 자아들 역시 하나의 몸 안에 자리 잡고 그 몸을 통해 떠오른다는 점에서, 김혜순 식의 시적 상상 체계 및 운동의 전체성과 연속성을 그려볼 수 있으리라.

 

「한 잔의 붉은 거울」속의 소통 단절은 '나'도 '너'도 '취함'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함께 취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취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 속으로 파고듦과 동시에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상대방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려는 이중의 본능을 수행하려 한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누구보다도 고독하고, 또, 누구보다도 당신과 나 사이에 차이를 없애려는 역설적인 의지를 가진다." 라고 보았을 때, 이 이중의 의지가  '사랑'이나 '세계'로 수렴되지 못하고 발산의 무중력 상테로 날아간다. 시인은 이를 '비틀거린다' 라고 표현한다.

 

우리 시대 역시 '술권하는 사회'다. 이상이 '거울' 시편을 쓰면서 마셨던 술과, 김혜순이 시를 쓰면서 마시는 술의 이름은 다르지만 그 결과들은 '소통부재'라는 비극을 낳았다. '소통부재'는 문학의 보편적 '환지통'이다.

 

김혜순의 「한 잔의 붉은 거울」에서 시인은 시대의 '취함'을 보고 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거울' 은 “나는 해독하지 못한다” “내가 너무 많아 정말, 죽을 지경”이고라 느낄 만큼, 어지럽게 분열․증식하는 인격의 다성성이다. 넘쳐나는 이미지만큼이나 범람하는 욕망의 다중성, 취함의 비틀거림,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환지통’의 환(幻)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