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어느 푸른 저녁(기형도)

어느 푸른 저녁 -기형도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글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

시(詩)와 詩魂 2020.03.01

절대고독/김현승

절대 고독 김현승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 끝에서 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 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 나의 시(詩)는. (시집 {절대 고독}, 1970..

시(詩)와 詩魂 2020.02.21

명경(明鏡) /이상

명경(明鏡) -이상 여기 한 페이지 거울이 있으니 잊은 계절에서는 얹은머리가 폭포처럼 내리우고 울어도 젖지 않고 맞대고 웃어도 휘지 않고 장미처럼 착착 접힌 귀 들여다보아도 들여다보아도 조용한 세상이 맑기만 하고 코로는 피로한 향기가 오지 않는다. 만적 만적하는 대로 수심이 평행하는 부러 그러는 것 같은 거절 우(右)편으로 옮겨 앉은 심장일망정 고동이 없으란 법 없으니 설마 그러랴? 어디 촉진.........하고 손이 갈 때 지문이 지문을 가로 막으며 선뜩 하는 차단뿐이다. 오월이면 하루 한 번이고 열 번이고 외출하고 싶어 하더니 나갔던 길에 안 돌아오는 수도 있는 법 거울이 책장 같으면 한 장 넘겨서 맞섰던 계절을 만나련만 여기 있는 한 페이지 거울은 페이지의 그냥 표지

시(詩)와 詩魂 2020.02.17

푸른밤/나희덕

푸른 밤 - 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너에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 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시(詩)와 詩魂 2020.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