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산수유나무의 농사/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 - 문태준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 시집 『맨발』(창비, 2004) * 문태준 :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박사 졸업. 1994년 으로 등단.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등이 있다. 현재 불교방송 ..

시(詩)와 詩魂 2019.04.09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심보선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 -심보선 1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래 이 집 안에 더 이상 거창한 이야기는 없다 다만 푸른 형광등 아래 엄마의 초급영어가 하루하루 늘어갈 뿐 엄마가 내게 묻는다, 네이션이 무슨 뜻이니? 민족이요, 아버지가 무척 좋아하던 단어였죠 그렇구나 또 뭐든 물어보세요 톰 앤드 제리는 고양이와 쥐란 뜻이니? 으하하, 엄마는 나이가 드실수록 농담이 느네요 나는 해석자이다 크게 웃는 장남이다 비극적인 일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어디에도 구원은 없다 해도 나는 정확히 해석하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큰 소리로 웃어야 한다 장남으로서, 오직 장남으로서 애절함인지 애통함인지 애틋함인지 모를 이 집 안에 만연한 모호한 정념들과 나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2 바람이 빠진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천변을 달릴 때 풍경의..

시(詩)와 詩魂 2018.05.24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 -에일리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 -(에일리) 03:50 널 품기 전 알지 못했다 내 머문 세상 이토록 찬란한 것을 작은 숨결로 닿은 사람 겁 없이 나를 불러준 사랑 몹시도 좋았다 너를 지켜보고 설레고 우습게 질투도 했던 평범한 모든 순간들이 캄캄한 영원 그 오랜 기다림 속으로 햇살처럼 니가 내렸다 널 놓기 전 알지 못했다 내 머문 세상 이토록 쓸쓸한 것을 고운 꽃이 피고 진 이 곳 다시는 없을 너라는 계절 욕심이 생겼다 너와 함께 살고 늙어가 주름진 손을 맞잡고 내 삶은 따뜻했었다고 단 한번 축복 그 짧은 마주침이 지나 빗물처럼 너는 울었다 한번쯤은 행복하고 싶었던 바람 너까지 울게 만들었을까 모두, 잊고 살아가라 내가 널, 찾을 테니 니 숨결, 다시 나를 부를 때 잊지 않겠다 너를 지켜보고 설레고 우습게 질투도..

시(詩)와 詩魂 2017.11.20

이브 본푸아, 움직이는 말 머무르는 몸

나무들에게 ―이브 본푸아, 『움직이는 말, 머무르는 몸』에서 두브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지우며 그 위로 모든 길들을 막아 버렸던 그대들 죽어서조차 두브는 단지 빛에 지나지 않음을 냉정히 보증하는 그대들. 허기와 추위 그리고 침묵의 동전을 입속에 꼭 물고는 사자(死者)들의 나룻배에 그녀가 몸을 실을 때 치밀한 섬유질인 나무들 그대들은 내 곁에 있었지. 개떼들과, 형체를 알 수 없는 뱃사공과 그녀가 나누려는 대화를 그대들을 통해 듣게 되면 그토록 많은 밤을 뚫고 강줄기 전체를 무릅쓰는 두브의 전진에 의해 나도 그대들의 일원이 된다. 나뭇가지 위로 구르는 우렁찬 천둥이 여름의 정점에서 불사르는 축제들은 그대들의 준엄한 중재 속에서 두브의 운명과 내 운명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또 하나의 ..

시(詩)와 詩魂 2017.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