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에게
―이브 본푸아, 『움직이는 말, 머무르는 몸』에서
두브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지우며
그 위로 모든 길들을 막아 버렸던 그대들
죽어서조차 두브는 단지 빛에 지나지 않음을
냉정히 보증하는 그대들.
허기와 추위 그리고 침묵의 동전을
입속에 꼭 물고는 사자(死者)들의 나룻배에
그녀가 몸을 실을 때 치밀한 섬유질인 나무들
그대들은 내 곁에 있었지.
개떼들과, 형체를 알 수 없는 뱃사공과
그녀가 나누려는 대화를 그대들을 통해 듣게 되면
그토록 많은 밤을 뚫고 강줄기 전체를 무릅쓰는
두브의 전진에 의해 나도 그대들의 일원이 된다.
나뭇가지 위로 구르는 우렁찬 천둥이
여름의 정점에서 불사르는 축제들은
그대들의 준엄한 중재 속에서
두브의 운명과 내 운명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또 하나의 목소리
이브 본푸아
불사조의 재와 같은 머리채를 흔들며
모든 것이 멈춘 시간에 그대는 어떤 몸짓을 시도하는가?
자정이 존재 속에서 평석(平石)들을 비출 때에.
*
검은 입술 위에 어떤 표시를 드러낸 채
모든 것의 침묵 속에서 그대는 어떤 초라한 말을 남기려는가?
벽난로의 아궁이가 어설피 다시 막힐 때 타다 남은 남겨진 불씨와도 같이.
*
그대 안에서 사는 법을 알아내리라, 나는 끄집어내리라
그대 속에서 모든 빛을
암초와 법칙, 모든 구체화된 덩어리들을.
*
그리고 내 그대를 올려놓은 공허 속에다 나는 뚫어 놓으리
벼락의 길을
아니면 존재가 결코 시도한 적이 없는 더욱 큰 고함 소리를.
*
만약 이 밤이 여느 밤과 다르다면
다시 태어나라, 멀지만 나의 편인 목소리여, 깨워라
잠자는 씨앗을 품고 있는 묵직한 점토를
그리고 말하라: 나는 욕망을 가진 땅덩이일 뿐이었다고
이것은 결국 새벽과 비의 말씀이다.
그러나 아직도 해가 매몰되어 있는가를 말하라
나는 여전히 호의적인 대지임을 밝혀 말하라.
세계의 양면성, 존재의 환원성 (오은 시인)
이브 본푸아의 시집 『움직이는 말, 머무르는 몸』은 이 세계의 양면을 보여 주는 시집이다. 여기를 이야기하면서 저기를 보여 주고 폐허를 노래하는 동시에 낙원을 드러내고 육체를 어루만지면서 잠자고 있는 영혼을 들깨운다. 이 법석임은 시집을 읽는 내내 머리와 가슴에 고요한 파문이 일게 한다.
그리하여 시집을 덮을 때쯤이면 삶과 죽음은 본디 한 몸이었음을, 빛과 어둠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밤은 아침의 직전이고 아침은 밤이 생길 기미였음을, 말과 침묵은 동시에 발산될 수 있는 것임을, 그리고 맹목(盲目)은 한 끗 차이로 투시(透視)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죽음은 불시에 찾아오는 것인 동시에, 더없이 경건히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어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죽음 앞에서 현존(現存)함을 가장 생생히 느낀다. 그것은 “두브의 운명과 내 운명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는 시구처럼, 하나의 운명과 또 하나의 운명이 만나는 단 한 번의 놀라운 순간이다.
이브 본푸아의 시집 『움직이는 말, 머무르는 몸』은 이 세계의 양면을 보여 주는 시집이다. 여기를 이야기하면서 저기를 보여 주고 폐허를 노래하는 동시에 낙원을 드러내고 육체를 어루만지면서 잠자고 있는 영혼을 들깨운다. 이 법석임은 시집을 읽는 내내 머리와 가슴에 고요한 파문이 일게 한다.
그리하여 시집을 덮을 때쯤이면 삶과 죽음은 본디 한 몸이었음을, 빛과 어둠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밤은 아침의 직전이고 아침은 밤이 생길 기미였음을, 말과 침묵은 동시에 발산될 수 있는 것임을, 그리고 맹목(盲目)은 한 끗 차이로 투시(透視)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두브의 입을 빌려 이를 전하는 본푸아의 시편들은 떠나면서 돌아오는 것 같은, 지워지면서 생생해지는 것 같은 야릇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존재가 결코 시도한 적이 없는 더욱 큰 고함 소리를” 지르는 세계는 몸과 말이 만나 마침내 몸-말이 되는 세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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