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이브 본푸아, 움직이는 말 머무르는 몸

나뭇잎숨결 2017. 11. 9. 17:37

 

 

 

 

 

 

 

 


나무들에게
―이브 본푸아, 『움직이는 말, 머무르는 몸』에서


두브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지우며
그 위로 모든 길들을 막아 버렸던 그대들
죽어서조차 두브는 단지 빛에 지나지 않음을
냉정히 보증하는 그대들.

허기와 추위 그리고 침묵의 동전을
입속에 꼭 물고는 사자(死者)들의 나룻배에
그녀가 몸을 실을 때 치밀한 섬유질인 나무들
그대들은 내 곁에 있었지.

개떼들과, 형체를 알 수 없는 뱃사공과
그녀가 나누려는 대화를 그대들을 통해 듣게 되면
그토록 많은 밤을 뚫고 강줄기 전체를 무릅쓰는
두브의 전진에 의해 나도 그대들의 일원이 된다.

나뭇가지 위로 구르는 우렁찬 천둥이
여름의 정점에서 불사르는 축제들은
그대들의 준엄한 중재 속에서
두브의 운명과 내 운명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또 하나의 목소리
이브 본푸아


불사조의 재와 같은 머리채를 흔들며
모든 것이 멈춘 시간에 그대는 어떤 몸짓을 시도하는가?

자정이 존재 속에서 평석(平石)들을 비출 때에.

*
검은 입술 위에 어떤 표시를 드러낸 채
모든 것의 침묵 속에서 그대는 어떤 초라한 말을 남기려는가?
벽난로의 아궁이가 어설피 다시 막힐 때 타다 남은 남겨진 불씨와도 같이.

*
그대 안에서 사는 법을 알아내리라, 나는 끄집어내리라
그대 속에서 모든 빛을

암초와 법칙, 모든 구체화된 덩어리들을.

*
그리고 내 그대를 올려놓은 공허 속에다 나는 뚫어 놓으리
벼락의 길을

아니면 존재가 결코 시도한 적이 없는 더욱 큰 고함 소리를.

*
만약 이 밤이 여느 밤과 다르다면
다시 태어나라, 멀지만 나의 편인 목소리여, 깨워라
잠자는 씨앗을 품고 있는 묵직한 점토를
그리고 말하라: 나는 욕망을 가진 땅덩이일 뿐이었다고
이것은 결국 새벽과 비의 말씀이다.
그러나 아직도 해가 매몰되어 있는가를 말하라
나는 여전히 호의적인 대지임을 밝혀 말하라.



세계의 양면성, 존재의 환원성 (오은 시인)

이브 본푸아의 시집 『움직이는 말, 머무르는 몸』은 이 세계의 양면을 보여 주는 시집이다. 여기를 이야기하면서 저기를 보여 주고 폐허를 노래하는 동시에 낙원을 드러내고 육체를 어루만지면서 잠자고 있는 영혼을 들깨운다. 이 법석임은 시집을 읽는 내내 머리와 가슴에 고요한 파문이 일게 한다.

그리하여 시집을 덮을 때쯤이면 삶과 죽음은 본디 한 몸이었음을, 빛과 어둠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밤은 아침의 직전이고 아침은 밤이 생길 기미였음을, 말과 침묵은 동시에 발산될 수 있는 것임을, 그리고 맹목(盲目)은 한 끗 차이로 투시(透視)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죽음은 불시에 찾아오는 것인 동시에, 더없이 경건히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어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죽음 앞에서 현존(現存)함을 가장 생생히 느낀다. 그것은 “두브의 운명과 내 운명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는 시구처럼, 하나의 운명과 또 하나의 운명이 만나는 단 한 번의 놀라운 순간이다.

 

이브 본푸아의 시집 『움직이는 말, 머무르는 몸』은 이 세계의 양면을 보여 주는 시집이다. 여기를 이야기하면서 저기를 보여 주고 폐허를 노래하는 동시에 낙원을 드러내고 육체를 어루만지면서 잠자고 있는 영혼을 들깨운다. 이 법석임은 시집을 읽는 내내 머리와 가슴에 고요한 파문이 일게 한다. 


그리하여 시집을 덮을 때쯤이면 삶과 죽음은 본디 한 몸이었음을, 빛과 어둠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밤은 아침의 직전이고 아침은 밤이 생길 기미였음을, 말과 침묵은 동시에 발산될 수 있는 것임을, 그리고 맹목(盲目)은 한 끗 차이로 투시(透視)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말과 몸이 만나는 현장에서는 매번 수렴과 발산이 동시에 일어난다. 존재에의 수렴과 존재로의 발산은 민첩하게 움직이면서 잠자코 머무르는 것 같은 기이한 경험을 선사해 준다. 장면을 절로 상상하게 만드는 매혹적인 문장들은 칠흑 같은 밤하늘에 떠 있는 총총한 별처럼 당신의 가슴에 박힐 것이다. 존재가 품는 근원적 의지는 다름 아닌 ‘존재하기’일 것이다. 두브와 함께하는 여정은 현존을 향한 모험인 동시에 시(詩)의 뿌리, 나아가 언어의 뿌리를 찾아 헤매는 고행이기도 하다. 


두브의 입을 빌려 이를 전하는 본푸아의 시편들은 떠나면서 돌아오는 것 같은, 지워지면서 생생해지는 것 같은 야릇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존재가 결코 시도한 적이 없는 더욱 큰 고함 소리를” 지르는 세계는 몸과 말이 만나 마침내 몸-말이 되는 세계일 것이다.

 


 

오은 시인

오은 1982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2002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가 있다..

'시(詩)와 詩魂'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월의 시  (0) 2018.05.08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 -에일리  (0) 2017.11.20
신경림의 벽화  (0) 2017.10.18
장석주, 시적 순간  (0) 2017.08.08
장미와 가시/김승희  (0) 2017.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