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 장석주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어보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가리라
깨끗한 여름 아침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지금보다 더 자주 미소 짓고
사랑하는 이에겐 더 자주 ‘정말 행복해’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더 자주 안으리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보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상처받는 일과 나쁜 소문,
꿈이 깨어지는 것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벼랑 끝에 서서 파도가 가장 높이 솟아오를 때
바다에 온몸을 던지리라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말하기는 어렵지만, 무엇이 문학이 아닌가를 말하기는 비교적 쉽다. 모호한 그대로 정의하자면, 문학은 언어를 매개로 하는 구조이고 그 구조를 구축하는 활동이다. 작가나 시인들이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 아마도 그것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시인의 본질에서 가장 내부에 있는 핵은 그가 자신이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 문장을 바꿔 써보자면, “문학의 본질에서 가장 내부에 있는 핵은 문학 그것 자체가 문학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은 그것의 내부에서 스스로 문학이라고 추인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문학은 문학-책이다. ―14쪽
시인에게 시가 된 장소란 항상 장소 이상이다. 이 장소들은 현실로서는 범박하고, 상상으로서는 비범해진다. 그 언덕과 들판, 강, 풀과 나무들, 장소의 지형과 지리 위에 사유와 영혼의 빛깔이 입혀질 때 그곳은 몽상과 좌초된 꿈이 나뒹구는 심연으로 변한다. 장소들은 시에 장소의 역동, 장소의 빛과 색을 다 내주고 거죽만 남는다. 장소들이 시적 몽상으로 도금(鍍金)될 때 돌연 “신들의 불확실한 거처, 신들의 오두막, 바람으로 지은 신들의 누옥, 신들의 흰옷을 빨아 널 무쇠 처형대”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95쪽
시인들은 사물과 현상을 응시하고, 우리가 하지 못한 말들, 집단무의식 속에 꿈틀거리는 꿈과 욕망들을 시로 쓴다. 시는 구체적 경험을 질료로 삼고,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내면을 비춰준다. 내면을 비추는 빛은 무의식에 억압된 기억들을 되살려내고, 그것들을 직시하게 하며, 우리가 겪는 혼란과 고통이 무엇 때문인지를 자각하도록 도움을 준다. 시는 우리의 제한적 경험의 범주를 넘어서고, 인습적 이해의 세계를 넘어서서 경험의 영토를 인지가 불가능한 곳까지 확장한다. 때로 시가 불가해한 느낌을 주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좋은 시는 마음에 기쁨을 일으키고 위로를 주며 치유의 효과를 나타낸다. 시 치료(Poetry Therapy)는 시를 읽고 향유하는 자의 인성?의식과 무의식의 총체, 혹은 내면화된 자아?과 시 작품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 과정에 바탕을 둔 읽기-치료의 한 방법이다. ―129~130쪽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아는 것, 즉 영적인 깨달음이 중요하다. 영적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감정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 곧 자기 내면을 성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길은 우리 앞에 놓인 길 중에서 가장 험하고 먼 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야 할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심장에 이르는 길이다.” 진정한 나를 아는 것이 곧 나를 넘어서 가는 길이다. ―174쪽
〈시인동네 비평선〉 001. 시인, 비평가, 문장노동자, 인문학자로 종횡무진 활동해온 장석주의 문학비평집. 다채로운 이력만큼이나 전방위적 글쓰기를 선보여온 장석주의 ‘문학비평가’로서의 심미안과 날카로운 펜촉을 만날 수 있다. 시인으로서의 감각과 풍부한 인문학적 교양이 결부된 그의 글은 한국 현대시를 새로운 관점에서 짚어보며, 이 시대 문학의 의의와 존재 방식을 탐색한다. 당대의 정치·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개별 작품을 분석하고, 거기서 공간, 정치, 감각, 무의식, 몸 등 문학과 밀접한 주제들로 외연을 확대해가는 그의 비평은 문학을 위한 문학비평을 뛰어넘어 지금-여기 문학의 역할을 다시 묻는다. 특정 시대의 시나 시풍에 기울지 않고, 특정한 이론에 기대지 않은 채 문학의 숲을 자유자재로 누비는 장석주의 비평은 문학과 삶의 본질을 겨냥하며 그것들이 간직한 시적 순간의 비밀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열한 번째 평론집의 제목으로 『시적 순간』을 선택한다. 이 선택의 사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시적 순간이란 서치라이트의 강력한 빛이 터지는 순간이 아니라 반딧불이가 어둠 속에서 미광을 반짝거리는 순간이다. 현대 문명은 과도한 조명으로 밤의 어둠을 말살하고, 반딧불이들을 밀어냈다. 시적 순간이란 반딧불이와 마찬가지로 곧 사라지고 말 운명에 처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반딧불이들이 보여주는 중요한 생태적 지표나 목가적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은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밤이 최고로 깊어진 시간에야 우리는 최소의 미광까지 포착할 수 있고, 빛의 꼬리가 아무리 가늘어도 그것을 통해 여전히 빛의 날숨 그 자체를 볼 수가 있다.” 반딧불이와 시인의 운명은 닮아 있다. 반딧불이가 시인이라는 은유를 온전하게 감당할 수 있다면, 밤의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반딧불이의 미광을 시라고 말하지 못할 까닭은 없다. 시적 순간은 물구나무를 선 채 세계를 바라보는 찰나이고, 뇌의 전두엽에 영감의 우레가 울려 퍼지며 창조의 자궁에 최초의 시적 이미지들이 착상하는 시간이다. 시인들은 그 시적 순간을 위해 살며, 그 시적 순간 속에서 시를 빚어낸다. 제 피를 찍어 시를 한 줄 한 줄 적어 내려가는 시인들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반딧불이가 완전히 생태계에서 소멸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서문」에서
『시적 순간』은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에 가작 당선된 이래 36년 동안 활발히 비평 활동을 해온 장석주의 열한 번째 문학비평집이다. 장석주는 다채로운 이력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는 오랜 시간 시인, 비평가, 출판업자, 인문학자로 활동하며 입때껏 80여 권의 책을 집필했다.
책을 쓰고 읽고 만들었던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 그는 자타 공인의 열정적인 다독가이자 다작가이다. 그가 읽고 쓰는 범주는 어느 한곳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이것은 삶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범위를 특정할 수 없고, 항상 한계를 돌파하여 새로움을 추구하는 문학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장석주의 비평이 갖는 특별함이 있다. 그의 문학비평은 문학 전공자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문학을 위한 문학비평이 아니다. 시인으로서의 감각과 인문학적 통찰이 겸비된 그의 문학비평은 개별 작품을 분석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의미를 문학의 본질, 그리고 인간과 사회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특정 시대의 시나 시풍에 기울지 않고, 특정한 이론에 기대지도 않은 채 직관과 통찰과 사유로써 한국 현대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이 시대 문학의 의의와 존재 방식을 탐구한다.
비평의 대상이 되는 작품들을 당대의 정치·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파악하고, 거기서 지금-여기 문학의 역할을 모색하는 그의 작업은 우리에게 문학과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그렇게 예상치 못했던 각도에서 무언가를 돌아보게 되는 순간을 우리는 ‘시적 순간’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시적 순간』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공간, 정치, 감각, 동물성 등을 주제로 문학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며, 제2부는 무의식, 상상력, 몸, 우주 등이 시와 맺는 관계에 주목하며 시인과 독자와 사회의 아픔을 치유하는 수단으로써 시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제3부는 우리 시대 가장 뛰어난 시인인 고은을 꼼꼼하게 분석하고 있다.
‘문장노동자’를 자처하는 만큼 명문장가로 손꼽히는 그의 글은 깊은 글속을 유려한 문체로 알기 쉽게 풀어내는 한편 다독가로서의 명성을 증명하듯 동서고금을 막론한 다양한 인용을 적재적소에 선보이며 문학비평을 한층 더 높은 교양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장석주는 여기에 대해 어떤 답도 내놓지 않는다. 다만 이제껏 그가 열정을 갖고 읽고 사유한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 앞에 펼쳐놓을 뿐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시인이자 현장비평가로, 사색가이자 인문학자로 활동해온 그가 높은 학식과 폭넓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풀어놓는 한국 현대시에 대한 해설은 그 자체로 문학의 본질과 숙명을 겨냥하고 있다.
문학의 힘을 과신하지 않고, 문학의 미래를 낙관하지 않는 토로는 문학을 향한 그의 진심 어린 걱정과 애정을 짐작케 하며, 그의 문학비평에 신뢰를 더한다. 서문에 드러난 문학비평가로서의 솔직담백한 소회와 불의에 응전하는 문학에 대한 열렬한 응원은 이 시대 문학비평의 존재 의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특히 인간, 사회, 우주를 아우르는 문학을 통한 상처의 치유를 말하는 제2부의 글들은 일반의 문학비평을 넘어서는 것이다.
『시적 순간』은 36년 동안 문학을 지키며 우리 시대 신뢰한 만할 문학비평가로 활약해온 장석주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한국 문학비평의 현주소이자 최전선이다.(출판사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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