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몹쓸 동경(憧憬-황지우)

나뭇잎숨결 2017. 3. 30. 12:38

몹쓸 동경(憧憬)

 

 

 

- 황지우

 

 

 

그대의 편지를 읽기 위해 다가간 창은 지복(至福)이 세상에

잠깐 새어들어오는 틈새; 영혼의 인화지 같은 것이 저 혼자

환하게 빛난다. 컴퓨터, 담뱃갑, 안경, 접어둔 화집(畵集) 등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천장에서, 방금 읽은 편지가 내려왔다.

이데올로기가 사라지니까 열광은 앳된 사랑 하나; 그 흔해빠진

짜증스런 어떤 운명이 미리서 기다리고 있던 다리를

그대가 절뚝거리면서 걸어올 게 뭔가.

이번 생(生)에는 속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모든 도로의 길들

맨 끝으로 뒷걸음질치면서 천천히 나에게 오고 있는,

그러나 설렘이 없는 그 어떤 삶도

나는 수락할 수 없었으므로 매일, 베란다 앞에 멀어져가는

다도해가 있다. 따가운 후두음(喉頭音)을 남겨두고 나가는 배; 그대를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하여 그대를 지나쳐왔다. 격정 시대를

뚫고 나온 나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지루한 것이었다.

맞은편 여관 네온에 비추인 그대 속눈썹 그늘에 맺힌 것은

수은의 회한이었던가? "괴롭고 달콤한 에로스"*

신열은 이 나이에도 있다. 혼자 걸린 독감처럼,

목 부은 사랑이 다시 오려 할 때 나는 몸서리쳤지만,

이미 산성(山城)을 덮으면서 넓어져가는 저 범람이 그러하듯

지금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대는,

이삿짐 트럭 뒤에 떨궈진 생을 두려워하지는 않는지.

신화와 뽕짝 사이 사랑은 영원한 동어 반복일지라도

트럭짐 거울에 스치는 세계를 볼 일이다.

황혼의 물 속에서 삐걱거리는 베키오 석교(石橋)를

그대가 울면서 건너갔을지라도

대성당 앞에서, 돌의 거대한 음악 앞에서

나는 온갖 대의와 죄를 후련하게 잊어버렸다.

나는 그대 앞의 시계를 보면서 불침번을 선다.

그대 떠나고 없는 마을의 놀이터 그네에 앉아

새벽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다.

동경은 나의 소명받은 병이었다. 지구 위에 저 혼자 있는 것 같아요,

라고 쓴 그대 편지를 두번째 읽는다.

           

 

 그날, 세련되게 차려입고 촌스럽게 아내의 손을 꼭 움켜잡은 그는, 동행해온 '똘똘이 스머프' 정과리 부부를 놓쳐, 현대적으로 복잡한 드골 공항에서 방향을 잃고 엉뚱한 출구로 나오는 바람에 한바탕 애를 먹여놓고도, 여유롭게 나의 영접을 받았다. 그리고는 곧 오랜만의 회포를 시적으로 즐기기 시작했는데(그가 기분이 좋아 말을 풀어내기 시작하면 한마디 한마디를 시처럼 읊는다), 그날이 하필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이었던 것도 우연이었지만 멋진 무대 효과가 있었다. 1995년 7월 14일. 프랑스 최대의 축제의 밤에 우리는 파리 전체를 휩쓰는 엄청난 인파 위에 나뭇잎처럼 떠 흐르다가, 에펠 탑이 빤히 건너다보이는 트로카데로 광장에서 머리 위로 하늘 가득 터져 번지는 현란하고 끝없는 불꽃놀이에 완전히 취해버렸었다. 그리고는 밤늦도록 이리저리, 어느 거리를 헤매고 어느 술집엘 들렀던가.

 

그때 이걸 그에게 말로 건넸었는지 아니었는지 기억이 확실치 않으나, 어쨌든 그때 나는 문득 '시'라는 것도 불꽃놀이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바로 '시인'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소설을 불꽃놀이에 비유하기란 힘들다). 한순간 현란하다가 덧없이 스러져버린다는 의미에서가 물론 아니고, 오히려 중요한 기억이 되살아날 때면 - 세속적으로는 그게 기념일이나 축제일이다 - 어김없이 다시 어둠의 높은 곳에 터져오르는 황홀한 빛무늬라는 의미에서, 불꽃놀이와 시는 내통한다. 좋은 시란 그렇듯 우리 마음에 맺혀 있는 어떤 매듭이 건드려지는 순간마다 다시 울려오는 법이므로. 그리하여 그때, '황지우 시인'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내 생각은 약간의 질투가 섞인 채 이렇게 이어졌었다. 그의 시는 앞으로 삶의 굴곡을 지닌 모든 이들의 저 깊은 어둠 속에서 거듭거듭 불꽃놀이처럼 피어오르리라고.

 

 

                                                                        

 

- 위 시집 발문, 이인성, ''영원한 밖'으로 떠나고 싶은, 떠나기 싫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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