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 이성부

나뭇잎숨결 2020. 8. 4. 09:48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 이성부                 

 

 

 

내가 걷는 백두대간 133 
 

작은 산이 큰 산 가리는 것은
살아갈수록 내가 작아져서
내 눈도 작은 것으로만 꽉 차기 때문이다

 

먼데서 보면 크고 높은 산줄기의 일렁임이
나를 부르는 은근한 손짓으로 보이더니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봉우리 제 모습을 감춘다


오르고 또 올라서 정수리에 서는데
아니다 저어기 저 더 높은 산 하나 버티고 있다


이렇게 오르는 길 몇번이나 속았는지
작은 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나를 가두고
그때마다 나는 옥죄어 눈 바로 뜨지 못한다

 

사람도 산속에서는 미물이나 다름없으므로
또 한번 작은 산이 백화산 가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것도 하나의 질서라는 것을 알았다

 

다산은 이것을 일곱살 때 보았다는데
나는 수십년 땀 흘려 산으로 돌아다니면서
예순 넘어서야 깨닫는 이 놀라움이라니

 

몇번이나 더 생은 이렇게 가야 하고
몇번이나 더 작아져버린 나는 험한 날등 넘어야 하나

 

 

내가 걷는 백두대간 110  

 

내 서러움이 매를 맞아 풋울음을 운다 

내가 나를 두들기는 손에 주름 잡힌 힘 있어 

내 노여움이 터져나오는 쇳소리도 때려잡아 순한 황소울음으로 바꾼다 

 

내가 알맞게 추스리는 것은 소리가 가야 할 길

멀리 널리 되살아나게 하는 일 

우리나라 김천 징소리는 산줄기를 닮아 부드럽게 일어나 춤을 추며 넘실거린다

 

벅찬 사랑 닮아 치달렸음이여 

슬픔과 노여움이 산같이 쌓인 뒤에라야 오는 고요함처럼

그 뒤를 따라가는 내 발걸음처럼 이 울음은 내가 무담시 내지르는 소리 아니다 

 

* 울음잡기 : 방짜 징을 만들 때 쇠를 두들겨 소리를 가다듬는 일   풋울음 : 울음잡기를 할 때 처음으로 나는 소리   무담시 : 까닭없이, 괜히 등으로 쓰이는 전라도 말   사랑이 말을 더듬거렸다-

 

 

내가 걷는 백두대간 113  

 

산이 땅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산을 일구며 올라간다 

 

이 산을 따라가는 내 발걸음도 갈수록 무거워

나는  내가 버겁다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손쉽게 오지 않는 법이다

그럴듯한 수사나 바람둥이 같은 매끄러움 부려도 오지 않는 법이다 

 

이 산을 가운데 두고 이쪽 저쪽 사람들 서로 서먹서먹했다마음을 열지 못했다 

나지막한 고개가 뚫리면서부터 사랑도 오고 갔으나 말을 더듬거렸다 

그래서 눌의산이 되었음일까 

 

지금은 이기슭으로 철도가 지나가고 고속도로가 지나간다 국도와 옛 길도 나란히 달린다 

오랜 어려움 끝에 오는 아름다운 사람이 이리 너그럽고 이리 편안하다 

 

* 눌의산 : 추풍령 서쪽에 있는 산. 해발743m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 다산 정약용이 일곱살 때 지었다는 한시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에서 빌려옴  백화산 : 경북 문경시와 충북 괴산군 경계에 소소은 산. 해발 106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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